로고스의 창

두 가지 삶

시애틀항해일지 2010. 5. 28.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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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6:39-49

열매로 알 수 있는 제자의 진가

Fri, 28th May 10

 

■ 본문과 씨름하며

 

 

 

1. 네 눈의 들보를 빼라(39-42절)

 

맹인에 대한 비유가 나오고 있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없고,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다.

우리는 가르치는 자가 되기전에 그런 자질이 준비되었는지를 물어야 한다. 선생의 수준 이상으로 제자가 자라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도리어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것 처럼 우리자신도 알지 못하면서 남을 가르치려 하고 있지는 않는가?

야고보 사도는 ‘많이 스승이 되지 말라’(약3:1)고 한다.

(약 3:1-2) 『[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사도바울은 로마서 2:19-21에서

『[19]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만일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형제에게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라 하라’고 한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경우를 많이 본다.

먼저, 네 눈속의 들보를 빼어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성경의 거울에 우리자신을 비추어 보아서 먼저 우리속의 들보를 빼어야한다. 그러고서야 남의 눈의 티도 제거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말씀묵상과 기도

하지만, 남의 눈에는 들보가 든 것 처럼 보이고 자기 눈에는 티가 있는 것 처럼 생각이 드니 이것이 죄성이고 아집이다.

 

우리에게 두가지 잣대가 있는 것이다. 남을 향한 엄격한 잣대를 자신에게 대고, 나에게 대는 관용의 잣대를 남에게 대어 준다면 균형이 맞지 않겠는가?

 

 

2. 열매로 아는 나무(43-45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한다.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다.

좋은 열매를 맺는 방법은 무엇일까?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나올 수 밖에 없다. 먼저 우리의 마음이 바뀌어야 한다. 성령안에서 우리속의 죄성을 이기고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도록 기도하며 몸부림쳐야할 것이다.

 

 

3. 듣고 행하는 자(46-49절)

 

산상수훈의 말씀을 정리하면서 주님은 4절에서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하지 아니하느냐’고 찔러 주신다.

 

내 말을 듣는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듣고 행하는 자와 행하지 않는자에 대한 말씀이다.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위에 놓는 사람. 주초없이 흙위에 집을 짓는 사람. 평소에는 모른다. 하지만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힐 때 표가 난다.

반석위에 주초를 놓은 집은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통케 하지 못하나, 주초없이 흙위에 지은자는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다.

 

큰물과 탁류는 시험의 때, 고난의 때를 말한다. 우리는 듣는데 머무르고 행하는데까지 나가지 못하는 자는 아닌가? 쉽게 흙에 우리의 신앙을 대충 지어 놓는 자 그저 주여주여 소리만 외치는 자가 아니라 어렵지만 번석에 집을 짓는 짓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좋은 나무라고 스스로 속이고 다른 사람에게 우긴다 할찌라도 결국엔 열매가 모든 것을 말해줄 것이다. 혹시 우리는 입술로만 신앙생활하고 있지 않는가? 기초없이 집을 짓고 있지는 않는가?

날마다 ‘주님’을 부르는 만큼 삶의 전영역에서 주님의 통치를 즐거워하며 즐거이 순종하는 삶을 살게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