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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흐의 그림 이야기

시애틀항해일지 2011. 4. 30. 07:01

고흐의 그림 이야기 - 감자 먹는 사람들


감자 먹는 사람들

"등불 아래서 손을 뻗어 감자를 먹고 있는 이 사람들이 ...
바로 땅을 일군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반 고흐는 <감자 먹는 사람들>이 자신의 첫 작품이라고 하면서 이전 그림들은 모두 '습작' 이라고 했다.
야심찬 구성으로 네덜란드 시기를 대변하는 그 그림은 그의 전 작품 중에서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빼어난 것이다.

누에넨에 체류하던 1884년에서 1885년에 이르는 겨울 동안, 반 고흐는 농부들의 초상화 40여 점을 그렸다. 그 후 4월에는 전통적인 기법으로 대형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루트 가족이 다시 모델이 되어 주었다.

반 고흐의 첫번째 습작은 4명의 가족이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 것으로 테오에게 그 그림의 스케치 2점을 보냈다. 그 후 그는 첫번째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렸는데 현재 오테를로에 보관되어 있다.
그 달 말에 아틀리에에서 기억을 되살리며 그림의 결정판을 완성했다.

식탁에 둘러앉은 시골 사람들이라는 주제는 새로울 것이 하나도 없다. 이것은 네덜란드 거장들의 작품에서 착안한 것으로 반 고흐는 레르미트, 이스라엘스, 드 그루의 작품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당대의 보수적인 이상주의에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그는 사실주의적 경향이 있었고, 게다가 표현성을 지향했다.
자신의 그림이 '손으로 행해진 노동과 그들이 직접 정직하게 수확한 양식' 을 찬양하는 것이기를 바랐기에, '추함' 을 두려워하지 않고 농부들의 생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 또한 이 조용한 식사 장면은 그리스도 최후의 만찬을 연상시키면서 거의 신성함까지 느끼게 한다.
불안정한 공간과 시선의 불일치로 인해 5명의 등장인물은 제각각 고립되어 보이며 진정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반 고흐는 과감한 명암 효과를 이용해 그림의 전체적인 구성에 일관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것은 코르몽과 렘브란트의 영향 덕분이다.
소재가 입체감과 질량감을 회복시켜주는 반면, 오렌지색을 발하는 조명은 초록빛이 도는 파란색 배경을 더 두드러지게 해준다.

반 고흐도 밀레처럼 대지의 색으로 농부를 그리고자 했다. 그러나 그림의 흐릿한 색들이 테오에게는 전혀 매력적으로 비치지 않았다.
파리에서는 너무 어두운 그림이었고, 포르티에는 그 그림을 사주지 않았다.

동생과 반 라파르트의 비판으로 상처받은 빈센트는 앞으로의 작업 방향을 다시 잡았고, 팔레스palette(한 화가가 사용하는 색의 범위를 가리킨다:역자)를 더 환하게 바꿔나갔다.
그럼에도 언제나 <감자 먹는 사람들>의 가치를 확신하고 있었다.

"지금 내가 아무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면, 시간이 흘러도 그다지 크게 가치 있는 이물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반대로 만일 내가 미래에 어떤 가치를 지닌 인물이 된다면, 그것은 지금의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MHD

- 창해 ABC북 (반 고흐)

 

고흐의 그림 이야기 - 씨 뿌리는 사람


씨 뿌리는 사람

1874년부터 반 고흐는 테오에게 밀레의 "<만종L'Angelus du soir> 그 그림은 장엄하며 시 그 자체와도 같다" 면서 밀레(1814-1875)에 대한 열광적인 관심을 전했다.

밀레는 그의 자연주의적 취향에 부합하는 화가였다. 쿠에스메스에서 그림 실력을 쌓을 때는 <밭일Les Travaux des champs>, <정오Les Heures de la journee>, <씨 뿌리는 사람Le Semeur>의 복제 판화를 본떠 데생을 하곤 했다.

밀레의 작품만이 아니라 인간 밀레에게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예술에 생명을 걸어야 한다" 고 한 상시에Sensier(밀레의 전기를 쓴 작가:역자)의 글에 매료되었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네덜란드의 농촌에서 '밀레의 모든 것' 을 추구했고 선배 밀레의 기념비적인 인물화에 영향을 받아 농부들의 세계를 그리게 되었다.

밀레의 그림을 바탕으로 한 그의 <씨 뿌리는 사람>은 풍요의 상징으로서, 아를에 체류하던 1888년 6월 중순에 다시 다루어졌다. '보랏 빛을 띤 거대한 밭, 짙은 노란색의 하늘과 태양' 그와 같은 대조에 힘을 얻고 있는 반 고흐는 사실주의적인 경향을 떠나서 암시적이고 감정을 자극하는 색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앙케탱의 <수확La Moisson>을 떠올리면서, 그림의 구성을 낡은 달력 속에 있는 소박한 이미지들처럼 단순화했다.

반 고흐는 6월 말에 그 그림을 다시 손질하면서 보색들 간의 상호 작용을 강조하고 인물을 다시 그렸는데, 그러자 밀레의 그림과 더 비슷한 풍이 되었다. 확실히 "그것은 다루기 힘든 주제" 였고, 반 고흐는 그림에 만족하지 않았다.

가을이 되었을 때도, 씨 뿌리는 사람은 늘 그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11월에 그린 것은 고갱이 있을 때 시작되었는데, 단속적으로 끊어지는 붓질이 덜해졌고 태양이 둥그런 형태가 되는 등 종합 주의적인 특성이 강했다.

전경에 드러나는 남자는 일본 판화에서처럼 중심을 벗어나 있고, 앞이 차단되어 있다. 뒤편의 나무는 고갱의 <설교가 끝난 후의 환상Vision apres le sermon>(1888, 에든버러,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에 그려진 나무를 연상시키는데, 그림의 전체적인 전망을 평면적으로 만들고 있다. 반 고흐의 작품들이 비록 퐁타벤의 '추상' 과는 반대되는 편에 있다 하더라도 씨 뿌리는 사람이라는 소재를 통해 그는 상상에 의지해서 구성된 인물을 다룬 그림이라는 뛰어난 장르에 뛰어들게 되었다.

생레미 시절 그는 다시 밀레의 모델들에 매달렸고, 라비에이가 제작한 <밭일>의 복제판화를 채색화로 옮겨 그렸다. 그렇게 해서 "치밀어오르는 과거의 기억들, 씨 뿌리는 사람과 태양 주위로 이글대는 불꽃 다발이 상징하고 있는 무한을 향한 열망" 을 담은 매혹적인 그림이 탄생했다. MHD

- 창해 ABC북 (반 고흐)

 

고흐의 그림 이야기 - 별이 빛나는 밤



별이 빛나는 밤

'지도에서 도시나 마을을 가리키는 검은 점을 보면 꿈을 꾸게 되는 것처럼,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은 늘 나를 꿈꾸게 만든다."


"요즘은 별이 반짝이는 하늘을 그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밤이 낮보다 훨씬 더 풍부한 색을 보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더 강렬한 보라색, 파란색, 초록색 들로 물든 밤 ... , 어떤 별들은 레몬빛을 띠고 있고, 다른 별들은 불처럼 붉거나 녹색, 파란색, 물망초빛을 띤다."

퐁타벤에 있는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반 고흐도 보이는 것을 넘어선 초월적인 것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런 것을 표현하기 위해 하늘이 선택되었다.
이 아이디어는 1888년 9월에 구체화되었다.

'자유로운 색채주의자' 가 된 반 고흐는 먼저 '아주 선명한 파란색 배경' 위로 별들이 신비롭게 반짝이는 <외젠 보흐의 초상Porrtait d'Eugene Boch>을 그렸다.

무한의 이미지는 여기서 영감과 꿈을 상징한다.
그 후 '인간의 무시무시한 열정' 의 이미지인 <밤의 카페Le Cafe de nuit>(1888, 뉴헤이븐, 에일대학미술관)를 그렸고, 별이 반짝이는 밤의 정경이 실제로 담겨 있는 최초의 그림 <밤의 카페테라스Le Cafe, le soir>(1888, 오테를로, 크롤러 뮐러 미술관)를 그렸다.

9월 말에는 테오에게 <론 강 위로 별이 빛나는 밤La Nuit etoilee sur le Rhone>의 스케치를 보냈다.

"하늘은 청록색이고, 물은 감청색, 대지는 엷은 보라색이다. 도시는 파란색과 보라색을 띠며, 노란색 가스등은 수면 위로 비치면서 붉은 황금색에서 초록빛을 띤 청동색으로까지 변한다. 청록색 하늘 위로 큰곰자리가 녹색과 분홍색의 섬광을 보인다. 그 중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별은 가스등의 노골적인 황금색과 대조를 이룬다. 전경에는 두 연인의 모습이 조그맣게 보인다."

반 고흐는 이 소재를 다루면서 대조적인 색채를 교묘하게 배합하여 사용했다.
밤이면 거의 뒤섞여 보일 만큼 모호한 경계를 보이는 땅과 물과 하늘은 일정한 방향을 가리키는 것 같은 붓질을 이용해서 그렸다. 이 그림은 1889년 앵데팡당전에 출품되었다.

생레미 시절, 다시 밤의 정경이 그려졌는데, 이번에는 열정적인 사이프러스나무와 함께였다.
반 고흐는 '더 남성적이고 더 자발적인' 양식을 얻기 위해 더욱 더 자연에서 멀어졌고, 더 과장된 스타일이 도입되었다. 꿈틀거리는 것 같은 붓질은 인광을 발하는 별들의 광채를 더욱 두드러지게 했다.
우주론적이고 범신록적인 시각에서 그려진 밤의 정경은 현실을 초월해서 더 고양된 자연, 그 속에 영혼이 각인된 자연을 재창조하고 있다. MHD

- 창해 ABC북 (반 고흐)

 

고흐의 그림 이야기 - 세 켤레의 구두



세 켤레의 구두

반 고흐는 화가로서의 작업에 도움을 받기 원하는 마음으로 헤이그에 있는 사촌 모베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 때 모베는 그를 나막신이 있는 정물 앞으로 데려갔다고 한다.
그 나막신은 빈센트가 최초로 그린 구두라 할 수 있다. 그 후 그는 구두를 소재로 한 그림을 10점이나 그렸는데, 그것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연작의 형태를 띠고 있다.

네덜란드 체류 시기에 그린 나막신이 있는 정물화 3점은 브라반트 시절에 그린 갈색톤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그림들 속에 등장하는 농부들과 농촌 아낙들이 신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파리에서 보낸 1886년에서 1887년에 이르는 겨울 동안 그는 5점의 구두 그림을 그렸는데, 그 중 적어도 1점은 그가 아직 코르몽의 화실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그린 것이었다.

그의 동료 가우지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벼룩시장에서 새로 윤을 낸 헌 구두를 사온 반 고흐는 그것이 너무 윤이 난다고 생각하고서 비오는 날 신고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진흙으로 더러워진 구두를 그림으로 그렸고, 그것이 화실에 다니던 다른 동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아를에서 빈 센트는 '농부들의 낡은 구두를 다룬 정물화'를 그렸다.
그 시리즈는 1888년 말 <나막신La Paire de sabots>(1888,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었다.

이에 대해 평론가들이 해석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어떤 사람들은 구두 그림들 속에서 전원 세계에 대한 공감의 표현과 도시 생활이나 부르주아적 관습에 대한 거부감을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이 구두들이 자화상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고 보았는데, 반 고흐가 두 켤레의 구두를 그릴 때면 그것은 각각 테오와 그 자신을 상징한다고 한다. MN

- 창해 ABC북 (반 고흐)

 

고흐의 그림 이야기 - 아를의 여인, 지누 부인


아를의 여인, 지누 부인

반 고흐는 1888년 2월 20일에 아를에 도착했다. 도데와 타르타랭의 고향에 정착하기 위해서였다. 당대의 많은 예술가들이 바르비종이나 퐁타벤, 동양이나 오세아니아주의 추종자들이었듯, 그도 영감을 끌어올 다른 어딘가를 찾고 있었다.

그는 몽티셀리와 세잔의 도시이며 들라크루아의 이국 취향, 르누아르에 영향을 미친 앵그르의 화풍과도 연관된 남프랑스를 선택했다. 그에게는 또 다른 세계였던 남프랑스는 '더 맑은 하늘 아래에서 자연을 보게' 하는 곳으로, 처음에는 '일본과 유사' 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카마르그 지방과 크로 지방의 풍경에서 '로이스달의 고풍스러운 네덜란드' 를 떠올리게 되었다.

다른 그림과의 "차이는 색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고 생각한 그는 분절된 붓질과 단조로운 채색법 사이에서 강렬한 색조를 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5월부터 노란집을 얻게 될 9월 중순까지, 반 고흐는 카페 드 라 가르에 묵었다.
미래뿐 아니라 현재에 대해서도 남프랑스에 신뢰를 갖고 있었던 그는 거기서 예술가 공동체를 설립할 꿈을 꾸었다. 함께할 동료로는 맥나이트, 에밀 베르나르, 그리고 누구보다 고갱을 염두해 두고 있었다.

고갱은 1888년 10월 23일에 아를에 도착하여 함께 살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전류를 일으키는' 동거 생활은 두 달 뒤에 막을 내렸다. 반 고흐가 자신의 귓불을 자른 사건으로 입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를에서 반 고흐는 풍경을 그리는 일에 몰두했고 꽃이 활짝 핀 과수원, 크로 지방의 들판, 생트마리의 바다와 배를 그렸다.

그 후에는 <해바라기Tournesols> 연작을 그리는 데 골몰했고, 씨 뿌리는 사람이라는 주제에 다시 매달렸다. 도시의 정경, 별이 빛나는 밤, 카페의 실내와 테라스 등 새로운 소재에도 손을 댔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어떤 점에서 보더라도 초상화를 그리는 일' 이었다.

그는 우체부 롤랭의 가족, 내과의사 펠릭스레, 화가 외젠 보흐, 알제리 병사 밀리에, 그리고 진정한 아를 여인의 화신이라 할 수 있는 하숙집 여주인 지누 부인등 주변 인물들을 그리는 데 전념했다. MHD

- 창해 ABC북 (반 고흐)
 
고흐의 그림 이야기 - 탕기 영감


탕기 영감

탕기 영감이라 불리던 줄리앙 프랑수아 탕기(1825-1894)는 파리 화가들에게 중요한 인물이었다.
1867년에 몽마르트르의 클로젤 가에 자리잡은 물감상인이었던 그는 많은 화가와 교류했고, 바르비종이나 아르장퇴유까지 순회 판매를 하기도 했다.

차츰 화가들이 그에게 그림을 맡기기 시작했다.
"가게 진열대에서는 모네, 피사로, 르누아르, 그리고 반 고흐, 세잔, 고갱의 그림을 볼 수 있었다." 라고 옥타브 미르보는 전하고 있다.

젊은 세대에 속했던 쇠라, 툴루즈 로트레크, 앙케탱, 드니, 세뤼지에 등은 그림을 보기 위해 열정적으로 모여들었다. 볼라크는 거기서 처음으로 세잔의 그림을 보고 열광하게 되었다고 한다.

탕기는 화가들에게 미리 그림값을 지불했고 외상도 주었다. 또 돈 대신 그림을 받고 화구를 주기도 했다.

빈센트가 탕기를 만나게 된 것은 테오 덕분이었는데, 탕기는 곧 그에게 관심을 보였고 종종 점심식사에 초대하는 등 특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반 고흐는 탕기 영감의 초상화를 3점 그렸다.
그 중 둘은 일본 판화를 배경으로 밀짚모자를 쓴 모습이며(1887, 니아르코스 컬렉션/파리, 로댕미술관),
세번째 그림이 가장 많이 알려졌다.(1887, 코펜하겐, 니 칼스베르크 미술관)

그 그림들은 모델의 선량함과 소박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로댕 미술관에 있는 그림은 원색을 사용하면서 인물의 입체감을 최소화하고 있는데 이것은 반 고흐의 신중한 일본 취향을 반영한다.

탕기의 죽음 이후 미르보는 그의 가게에 쌓여 있는 그림 매매를 주재했고, 볼라르는 그 때 세잔의 그림들을 샀다고 한다. CM

- 창해 ABC북 (반 고흐)
 
고흐의 그림 이야기 - 이탈리아 여인


이탈리아 여인

이탈리아 여인L'Italienne>은 파리 시절 말기인 1887년에서 1888년에 이르는 겨울에 제작되었다.
몽티셀리에서 분할묘법 이론과 일본 판화에 대한 연구를 거쳐 인상파 화가들에 이르기까지 반 고흐는 근대의 교훈을 소화 흡수해왔다.

<이탈리아 여인>은 예전에 모델이었다가 카페 르탬버랭을 운영하고 있는 아고스티나 세가토리를 모델로 한 그림이다. 반 고흐는 그녀와 개인적인 관계와 직업상의 관계를 유지했던 것 같다.
그는 그녀의 카페에서 1887년 3월 일본 판화전을 열었고, 카페에 앉아 있는 그녀를 그렸다.

그림의 구성은 인상파 화가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드가의 작품 <압생트L'Absinthe>(1876, 파리, 오르세 미술관) 나 마네의 <자두La Prune>(1876-1877, 워싱턴, 국립미술관)를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오르세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는 이 그림의 원래 의도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초상화 <탕기영감>에서처럼 이 그림의 회화적 공간은 극히 축소되었고, 판화의 장식적 효과도 강렬하게 채색된 배경을 드러내기 위해 포기되었다.

딱딱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인물은 오렌지색의 단일한 배경에 바로 대비되고 있다.
그녀는 세잔의 <커피포트와 여인La Femme a la cafetiere>(1890-1895, 파리, 오르세 미술관)처럼 애매한 태도로 꼿꼿하게 앉아 있다. 그림 상단과 오른쪽에 붉은 오렌지색과 초록색 선들로 이루어진 틀을 그려 넣음으로써 그림의 양식화가 한결 강조되고 있다.

반 고흐는 여기서 전적으로 독창적인 방식으로 신인상파 화가들이 고민하던 틀 만들기의 문제에 손을 대고 있다. 캔버스의 주된 각은 의자 등받이의 부차적인 각에 의해 균형을 이루고 있고, 보색 대비는 붉은색과 녹색의 줄무늬로 형태를 이루고 있는 여인의 얼굴 위에서 발견된다.

그녀의 표정은 반 고흐가 앙베르의 렘브란트 그림들에서 발견했던 신비로운 측면을 간직하고 있다. 그렇지만 인물의 상징적인 성격을 특징짓는 것은 얼룩 덜룩한 의상과 손에 들고 있는 두 송이의 패랭이꽃이다.

이 꽃들은 희망과 위안을 상징하는 것으로, 퓌비 드 샤반을 참고한 것이다.
반 고흐는 다른 무엇보다 인물화에 집착했다. 아를 시절에는 조제프 룰랭, 파시앙스 에스칼리에, 폴 외젠 밀리에의 초상화를 통해 어떤 원형, 어떤 관념을 표현하려 했다.

그는 다양한 소재를 다룬 착색 석판화와 성자들의 성상(아이콘) 사이를 오가면서, "과거에는 후광(後光)으로 표현했던, 우리가 알 수 없는 영원한 어떤 것" 을 반짝임 자체와 색조의 울림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MHD

- 창해 ABC북 (반 고흐)

 
고흐의 그림 이야기 - 아니에르 공원의 연인들


아니에르 공원의 연인들

1886년부터 조르주 쇠라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고, 신인상주의라는 용어가 그 사조의 공식 대변인 펠릭스 페네옹의 글 속에서 태어났다. 시냐크는 신인상파라는 명칭이 인상파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담고 있지 않음을 분명히 밝혔다. 그 두 사조는 모두 '빛과 색' 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추구했다. 단지 그 기술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인상파의 기법이 직관과 즉각적인 순간에서 나온다면, 신인상파의 기법은 반성과 영속성에서 온다."
로드, 슈브뢸, 쉬페르빌, 앙리의 과학 이론에 근거해서 시도된 분절된 붓질은 색의 시각적 혼합과 '단순한 물리적 혼합보다 훨씬 더 우월한' 빛의 혼합에 특권을 부여한다.

분할묘법divisionnisme(신인상파 화가들이 슈브뢸 같은 과학자의 색채이론에 근거하여 개발한 색채이론과 기법으로 작은 점으로 색을 표현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점묘법과 거의 동의어로 쓰인다:역자)은 1886년에서 1887년까지 많은 화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파리 시절 반 고흐는 독자적인 '점묘법' 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섬세한 선영과 대조적인 점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어떤 점에서는 툴루즈 로트레크의 방법과 유사하다.

1887년에서 1888년에 이르는 겨울 동안 쇠라, 시냐크와 가까이 지내던 반 고흐는 테아트르 리브르 당투안Theatre Libre d'Antoine에서 <아니에르 공원의 연인들Couples d'amoureux dans un parc a Asnieres>(1887년, 암스테르담)을 전시했다. 그것은 쇠라의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에 대한 야심찬 응답이었다.

반 고흐는 신인상파가 주류를 이루는 1888년의 앵데팡당전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아를에서는 '점묘법을 이용하지 않는 붓질, 다양한 붓질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작업법을 발견하려' 최선을 다했다.

그는 에밀 베르나르와 고갱의 종합주의에 관심을 가지기는 했지만, 그들처럼 점묘법을 경멸한 것은 아니었다. 점묘법이 종합주의보다 더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을 기법이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에게 이 기법은 '진정으로 새로운 발견' 이었다. MHD

- 창해 ABC북 (반 고흐)
 
 
고흐의 그림 이야기 - 가셰 박사의 초상


가셰 박사의 초상

생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던 반 고흐는 북프랑스로 돌아가면 건강을 회복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렇지만 소란스러운 파리에서 동생 가족과 생활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았고, 에라니에 있던 피사로도 그를 맞이 할 형편이 못되었다. 대신 피사로는 테오에게 오베르쉬르우아즈에 살고 있는 가셰 박사(1828-1909)를 추천해주었다.

가셰 박사는 반 고흐의 생애 마지막 두 달 동안 그를 돌봐주었다.
이 의사는 많은 면에서 빈센트의 관심을 끌었다.
아마추어 화가, 판화가, 수집가였던 그는 브라스리 앙들레의 사실주의자 그룹과 신아테네파 화가들과 친분이 있었다. 몽티셀리, 도미에, 쿠르베, 게다가 브뤼야스까지 만난 적이 있었던 그는, 브뤼야스에 대해서는 빈센트와 견해가 같았다.

1872년 가셰는 오베르에 집을 한 채 샀고, 도비니의 이웃, 피사로의 친구, 세잔의 하숙집 주인이 되었다.
반 고흐는 자신만큼이나 '병적이고 멍해 보이는' 그 남자에게서 괴리감을 느끼지 않았다.
자신과 그의 유사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렇지만 그의 직업과 신념이 그를 지탱해준다" 라고 했다.
가셰는 반 고흐의 그림을 높이 평가했고 전적으로 인정해주었다.

반 고흐가 판화 작업을 하도록 격려하기도 했던 그는 반 고흐가 그린 초상화 속에서 '광신자적인' 모습을 보인다. 반 고흐는 불그스름한 얼굴, 다갈색의 머리카락, 군청색 옷 등 고양된 색을 통해 가셰의 '열정적인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 그림은 가셰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MHD

- 창해 ACB북 (반 고흐)
 
 
고흐의 그림 이야기 - 장미


장미

모델을 구하지 못한 반 고흐는 파리에 도착한 여름에 거의 30점이나 되는 꽃 그림을 그렸다. 이것이 그에게는 '색의 사용을 위한 습작들'에 불과했다 하더라도, 또한 그가 아무리 사실을 부인할 지라도 반 고흐는 뛰어난 ? 그림을 그린 화가이다. 꽃들의 색채는 그를 매료시켰고 피었다가 덧없이 지는 모습은 일종의 도발과도 같았다.

아를에 도착했을 때, 꽃이 만개한 나무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빈센트는 '괴물처럼 환한' 과일나무를 그리는 일에 빠져들어갔다. 그는 급속도로 꽃이 활짝 핀 과일 나무 그림 6점을 완성했고, 계속해서 이듬해 봄에도 '모두 9점으로 구성된 연작'을 그리려고 생각했다.

1889년 1월 1일 병원에 입원한 그는 '빨리 아름다운 계절이 와서 꽃이 활짝 핀 과일나무를 그릴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몸이 아팠기에 4월에 4점을 그리는 것으로 끝났다.

반 고흐는 농가의 정원에 화판을 세우기도 했는데, 그곳의 꽃들은 색이 화려한데다 태양이 비치면 그 색체가 더 강렬해져서 그를 사로잡았다.

"꽃이란 정밀하게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색의 터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생레미에서 테오의 아들 빈센트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가까이 다가온 봄을 예고하듯 편도나무의 막 싹이 트고 있었다. 반 고흐는 조카의 방에 장식 할 수 있도록 '하얀 꽃을 피운 편도나무의 굵직한 가지들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두드러지는' 그림을 그렸다.

그는 꽃다발도 많이 그렸다.
<해바라기> 연작을 그린 후에는 화려한 붓꽃과 장미다발 연작을 그렸다.
'초록색 배경 위로 한 무더기의 장미꽃이 그려져 있거나, 분홍색 배경 위로 또다시 노란색 배경이 있고 그 위로 또 다시 노란색 배경이 있고 그 위로 아주 커다란 보라색 붓꽃 다발'이 보이는 그림들을 끝으로 프로방스 시절이 막을 내린다. MN

- 창해 ABC북 (반 고흐)

 

 

고흐의 그림 이야기 - 석고상이 있는 정물


석고상이 있는 정물

"편안한 마음으로 ... 책을 읽고 또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나 자신이 행운아라고 생각한다"


문학에 대한 사랑은 반 고흐에게 있어서 그림에 대한 사랑만큼이나 '신성한' 것이었다.
두 경우 모두 그의 취향은 절충주의적이어서 그 폭이 무척 넓었다.
그는 두 가지 절충이 "음식의 종류를 변화시키면 식욕이 좋아지는 경우" 와 같다고 생각했다.

사춘기 시절부터 그는 헤리엣 비셔 스토우와 디킨스를 존경했다.
구필 화랑의 런던과 파리 지점에서 일할 때 그는 키츠, 엘리엇, 위고, 르낭, 미슐레 등의 책을 읽었다.
신비주의에 심취한 시기에는 매일같이 성경을 탐독했다.
그 후 보리나주에서 고독하게 지낼 때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들의 글을 다시 읽게 되었고, 셰익스피어와 아이스킬로스의 작품도 읽기 시작했다.

1880년대에는 자연주의 문학을 발견한 것이 두드러진다.
반 고흐는 특히 졸라, 공쿠르 형제를 높게 평가했는데, 에르크만 샤트리앙과 리슈팽도 좋아했다.
<파리 이야기Romans parisiens>(1888,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는 리슈팽의 영향으로 제목을 정한 것이다.
아를에서는 알퐁스 도데의 <타르타랭>을 언급하는 일이 많았고, <무스메La Mousme>(1888, 워싱턴, 국립미술관)는 피에르 로티의 일본풍 소설에서 따온 제목이다.

반 고흐는 발자크가 묘사한 세계를 사랑했고, 죽기 2년 전부터는 종종 플로베르, 모파상, 위스망스의 글을 인용하곤 했다. 한편 말라르메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켰고, 보들레르에 대해서는 공공연히 비판했다.

그는 소위 상징주의 문학이란 것은 전혀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막연하고 난해하게 보일 뿐이었다.
독서는 그의 생각을 키워주었고, 화가로서의 입장을 뒷받침해주었으며, 위안을 가져다 주었다.
특히 그가 생레미의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독서는 크나큰 위안이 되었다. M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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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그림 이야기 - 성 가족 (렘브란트)


성 가족 (렘브란트)

"고갱과 나는 들라크루아나 렘브란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토론은 '전류가 흐를 만큼 격렬한' 것이었다. ... 프로망탱이 지적하는 것처럼 렘브란트는 마술사 같은 화가였다."

반 고흐는 런던이나 파리의 미술관에서 보았던 렘브란트(1606-1669)의 그림에 매료되어, 테어처럼 렘브란트의 복제화를 수집하기도 했다.

1877년에서 1878년까지 암스테르담에서 신학을 공부할 때, 그는 트리펜휘스에 소장되어 있던 거장 렘브란트의 부식동판화에 매료되었고, 흥분한 마음으로 렘브란트가 살았던 집을 찾아 브레드스트라트까지 가기도 했다.

<성 가족La Maison du charpentier> 같은 작품은 반 고흐로 하여금 깊은 생각에 잠기게 했고, 그가 연설해야 할 복음서에 대한 내용을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었다.

1883년 국립미술관에서 그는 렘브란트의 깊은 인간미에 감동받았다.
렘브란트는 시선이나 몸짓을 통해 애정이 가득한 장면만이 아니라 비극적인 장면도 표현할 수 있었다.
그는 특히 <유대인 신부(新婦)La Fiancee juive>에 감탄하면서 테오에게 "렘브란트를 마술사라고 부를 만한 근거가 있다" 고 말했다.

아를 시절 반 고흐는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내는 편지에 렘브란트의 예술이 이루어낸 가치에 대해 설명하려 노력하고 있다. "렘브란트의 영향력은 그의 그림에 다가간 사람 누구에게서든 발견할 수 있다" 는 것이다.
렘브란트는 종교적인 장면을 그릴 때조차 인간을 현실적인 모습으로 그렸으며, 성스러움의 의미가 그의 자연주의적인 시각과 결부되어 있음을 강조했다.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명암이 갖는 상징적, 정서적 가치는 고갱과 나눈 길고 긴 대화의 주제였다.

생레미의 요양원에서 빈센트는 테오가 보내준 렘브란트의 부식동판화를 바탕으로 자유롭게 변형시킨 모사화를 그렸다. '라자로의 부활' 이라는 주제는 특히 그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그 때까지 그가 피해왔던 종교적인 장면을 그릴 수 있게 해주었다. 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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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그림 이야기 - 생레미의 생폴 병원



생레미의 생폴 병원

아를에서의 비극적인 사건 이후 반 고흐는 1889년 5월 3일 생폴 드 모솔 Saint Paul de Mausole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곳에 입원해 있던 1년은, 그가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한 아를로 '건강을 위한 여행'을 떠난 이래 가장 자주 발발했던 심각한 발작들로 점철된 1년이었다.

의사는 빈센트가 간질병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끔찍한 공포 속에서 보낸 2주 간의 발작" 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던 물감을 삼키거나 석유를 마심으로써 음독 자살하려 했던' 다양한 기도들에 대해 전하고 있다.

이런 발작들이 멈추었을 때면, 아픈 것이 완전히 가라앉아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리곤 했다. 처음에는 정신병원의 실내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병원측에서 방 하나를 아틀리에로 내어주었다.

그는 병원 정貶【?다양한 소재의 영감을 얻어 붓꽃과 라일락을 그렸고, 창문을 통해 볼 수 있었던 밀밭을 그렸다.

건강이 많이 회복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희끄무레한 줄기를 가진 플라타너스나무가 있는 산책로, 나뭇가지의 조형적인 윤곽, 흐린 녹색의 나뭇잎들 위에서 갈짓자로 반짝이는 태양" <콩쿠르 형제의(일기Journal)>을 다룬 뛰어난 그림을 몇 점 그리는 데 몰두했다.

그 후 그는 보호자 한 명을 동반하고 들판에 나가 작업 할 수 있게 되었다. 자연의 격변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가파른 협곡, 울퉁불퉁한 길, 비바람이 몰아치는 밭, 파도 치는 구름들, 비틀어진 나무들, 혹은 어둡게 불타오르는 나무들, 두터운 가시덤불 등의 강렬한 형태를 거친 붓질로 다루었다.

그 그림들의 천재지변과도 같은 특징들은 테오를 놀라게 했다.
"극단적인 지점까지 밀고 나간 형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현기증이 일어날 지경이야."

1889년 7월에 다시 발작을 일으킨 빈센트는 그 후 황폐한 필치로 여러 점의 자화상을 그렸다. 그것들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냉정하게 그려졌다. 또한 과거에 그린 그림들을 다시 그렸고 <빈센트의방La Chambre de Vincent>, 들라크루아나 밀레의 복제판화를 채색화로 옮겨 그렸다.

그 즈음 그의 그림이 브뤼셀에서 열린 20인전에 전시되었고, 앵데팡당전에 전시된 그림은 모네, 쇠라, 피사로, 고갱, 기요맹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점점 더 생레미를 떠나고 싶어했던 빈센트는 1890년 5월 17일 파리에 도착했고, 그 후 가셰 박사를 만나기 위해 오베르쉬르우아즈로 떠났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여행이 되었다.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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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그림 이야기 - 숲의 정경


숲의 정경

1882년 빈센트는 헤이그 근교의 숲에서 그해 초 발견한 유화 기법을 시험해볼 흥미로운 소재를 발견했다. 일종의 낭만주의적인 멜랑콜리가 깃든 숲의 정경이라는 소재는 바르비종화파나 헤이그의 화가들의 사실주의에 부합하는 면이 있다.

테오가 자신의 그림이 잘 팔릴 수 있다고 판단하도록 하기 위해 특이하고 감상적인 분위기를 나타내려 노력하면서 숲의 그림 속에 인물들을 곁들이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가을 분위기인 그림에서 나뭇잎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바닥은 숲의 그늘에 가려 붉은 빛을 띠고 있다. 이 소재는 1887년 여름에 다시 다루어졌는데, 달라진 점은 그 즈음 반 고흐가 나무 줄기를 인상주의와 점묘법에 입각해서 그렸다는 점이다. 피사로, 쇠라와 가까웠던 그는 빛을 발하는 자연이 갖고 있는 색채의 가능성과 빛의 효과를 다루었다.

아를에서는 태양이 온통 내리쬐는 거대한 전경에 몰두했다. 숲의 정경을 소재로 한 그림이 다시 나타난 것은 생레미로 옮겨간 후였다. 반 고흐는 정신병원의 정원을 여러 차례 그렸다.

"황량한 정원에는 거대한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고, 그 아래로 키가 큰 풀이 다양한 독초들과 뒤섞인 채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이 정원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많은 작업을 할 수 있었다."

한 달 동안 입원해 있던 그는 이소재로 2점의 그림을 그렸고, 다음해에도 다시 그것을 다루었다.

첫번째 그림은 확실히 질이 떨어지는 것으로, 시장에서 파는 조악한 그림들만큼이나 진부한 것이었다. 여기서 돌 벤치, 초록색 송악, 장미와 협죽도는 영원한 사랑을 상징한다.

두번째 그림은 1889년 7월에 그려졌는데, 일화(逸話)적인 성격이 덜해졌다. 신중하게 선택된 색채도 다양하고 균형 잡혀 있으며, 붓질은 유연하고 물감이 두텁게 칠해져 있다.

반 고흐는 자신의 그림들 중 잘된 것은 어머니와 여동생을 위해 복제화를 그리곤 했는데 이 그림의 복제화도 그려두었다. 테오는 이 그림을 1890년의 앵데팡당전에 보냈고, 후에 가족들에 의해 암스테르담의 미술관에 기증되었다.

오베르 시절 반 고흐는 밀밭 그림에 매달리면서도 다시 우아즈 강변의 숲의 정경을 그렸다. 반듯하게 서 있는 보라색 포플러나무들은 풍경에 리듬을 주면서 꽃이 핀 풀밭을 더 두드러지게 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린 나무 줄기들은 너무 양식화되어 있어서, 더 이상 숨쉬는 것도, 산책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나무들은 바닥에 맞서면서 반쯤 묻힌 채로 뒤얽힌 뿌리들 속에서 꼼짝 못하고 있다. M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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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그림 이야기 - 흔들의자에 앉은 여인, 룰랭 부인


흔들의자에 앉은 여인, 룰랭 부인

1882년 반 고흐는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 "여인, 그들은 종교와도 같다고 했던 미슐레의 말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겠다" 라고 썼다.

부부가 되어서 가정을 꾸리는 일은 살아 있는 동안 늘 꿈꾸던 일이었지만, 그 꿈은 끝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런던에서 우르술라 로이어에게 거절당하고 그 후 사촌 케이 스트리커에게도 거절당한 빈센트는 헤이그에서 시엔과 동거 할 때 잠시 가정을 이루었다는 착각 속에 지냈다.

그는 "여성들과의 관계가 예술에 아주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고 생각했다.
작품 속에도 언제나 여성이 등장한다. 집에서 혹은 들판에서, 아니면 꽃이 핀 정원에 홀러 서 있거나 연인과 산책하는 모습으로.

아를에서 빈센트 반 고흐는 <오귀스틴 룰랭의 초상Portrait d'Augustine Roulin>(1888,빈터투르, 오스카 라인하르트 소장)을 그렸는데, 그녀는 노란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남편과 세 자녀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 가족은 인생의 단계를 다룬 연작에 해당하는 여러 초상화의 모델이 되었다.

룰랭 부인은 1888년 8월에 태어난 마르셀과 함께 두 차례나 모델을 서 주었으며, 또한 혼자서도 모성을 상징하는 인물화 <흔들의자에 앉은 여인La Berceuse>(1888년 12월에서 1889년 3월까지 동일한 주제로 5점의 그림이 그려졌다. 암스테르담, 보스톤, 시카고, 런던, 오테를로)의 모델이 되어 주었다.

"방금 고갱" 에게 어떤 그림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얘기했는데, 그것은 어린아이 같으면서도 동시에 순교자의 모습을 지닌 아이슬란드 어부들이 선실에서 그 그림을 보면서 어린 시절 요람에서 흔들리던 때의 느낌을 되살리는 그림이다. 어릴 때 듣던 자장가를 떠올리면서 말이다."

이 인물화에 만족한 반 고흐는 같은 그림을 다섯 번이나 그렸고, 그것을 3부작의 하나로 제시하고자 했다. "나는 이 그림이 해바라기 그림들 사이 걸려 있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해바라기 그림들은 양쪽 옆에 세워둔 큰 촛대처럼 보일것이다" 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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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그림 이야기 - 올리브나무



올리브나무

생레미에서 반 고흐는 산, 사이프러스나무, 올리브 밭 등 세가지 소재를 연작으로 그리고자 했다.
"그것은 다 함께 '프로방스의 인상' 을 형성할 것이다" 그러나 완성된 것은 올리브나무 그림뿐이었다.

건강을 회복하여 요양원을 떠날 수 있게 되자마자 빈센트는 빛에 따라 여러 색으로 변하는 올리브나무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6월의 청록색 조화에 뒤이어 가을의 오렌지빛 노란색이 택해졌다.

"올리브나무들은 아주 독특해서 그 색을 포착하기 위해 고전하고 있다. 그것은 어떨 때는 푸른빛 도는 은색이고, 어떨 때는 초록빛과 청동색을 띤 은색이어서 노란색, 분홍색, 보라색 혹은 오렌지색에서부터 희미하게 붉은 황토색으로까지 보이는 대지 위로 흰빛을 발한다."

그 당시 에밀 베르나르는 <올리브 정원의 그리스도Christ aujardin des oliviers>를 그리고 있었고, 고갱 역시 같은 소재를 다루고 있었다. 반 고흐는 거기에 불만을 품었다. "그들이 그리는 <올리브 정원의 그리스도>는 나를 화나게 한다. 거기서는 관찰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의 한 장면을 그린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오직 실제 풍경만이 그리스도의 고통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여기 머문다면, <올리브 정원의 그리스도> 같은 그림을 그리려 들지 않을 것이다. 대신 사람들이 보는 그대로의 올리브 수확 장면을 그린 후 ... , 그 안에 정확한 비례에 맞춰 인물을 그려넣을 것이다.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에 잠기게 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 큰 유혹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으로 그리스도가 올리브 정원에서 천사들과 함께 있는 그림의 습작을 긁어 지운 것이 두번째다. 진짜 올리브나무를 보고 그리면서 그리스도를 모델 없이 그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그러기를 원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머리 속으로는 어떤 식으로 그려야 할지 분명히 알고 있다. 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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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그림 이야기 - 우체부 룰랭


우체부 룰랭

화가가 된 후, 반 고흐는 종종 편지에 전도사를 꿈꿀 때 자신의 삶을 노동자와 가난한 자들에게 바쳤다고 쓰고 있다.

화가가 된 그는 '탐구하고 배우기 위해 인물화를 그리기' 를 희망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질적인 조건을 파악해야 했고, 그 일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카데미나 아틀리에에 나가서 실제 모델을 앞에 두고 습작을 하는 것은 반 고흐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단계에 불과했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보다 사회적 현실 속에 있는 진실한 모습의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거리나 요양원, 작업장에서 만난 사람들을 모델로 삼았다. 그러나 그런 식의 작업은 돈이 많이 들었기에, 생활비를 보내주는 테오에게 자신의 하는 일의 중요성을 설명해야 했다.

"그렇다 해도 나는 인물을 그리는 쪽이 단연코 좋다. 게다가 그림 시장이 언젠가는 풍경화에 싫증을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당장은 인물화가 모델 때문에 돈이 많이 들 수도 있지만, 우리에게 최상의 행운을 가져다줄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자신이 설정한 목표에 비하면 그 외의 동기들은 모두 하찮게 보였다.

"더 시간이 흘러 인물화의 모델을 발견하게 된다면, 내가 추구하던 것을 보여줄 수 있겠지. 그건 꽃이나 초목이 우거진 풍경을 다룬 그림과는 다르다." 아를에서는 그 생각을 더 깊게 파고 들어가, 룰랭 가족을 모델로 인생의 단계를 보여주는 연작을 만들었다.
그는 프로방스 지방을 대변하는 <아를의 여인L'Arlesienne>(1888, 파리, 오르세 미술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같은 상징적인 인물화를 그리기도 했지만, <시인Le Poete>, <사랑에 빠진 남자L'Amoureux>, <모성La Maternite>처럼 다양한 인간 유형을 그리기도 했다.

생래메 시절에는 낫질하는 사람이나 농부의 실루엣 등 인물들이 실루엣의 형태로 환원된다.
오베르에서는 다시 인물화로 돌아가서 초상화 몇 점을 그렸는데, 그 중에는 가셰 박사의 초상화도 있다. 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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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그림 이야기 - 직조공



직조공

1880년대에는 에술가들이나 대중들 사이에서 유례없이 사회적인 주제가 유행했다.
반 고흐는 자연주의가 이국적인 소재나 역사적인 주제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면서 왜소한 대중들의 삶 속에서 소재를 취하는 화가와 조각가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라파엘리, 뛰어난 화가이다. 레르미트, 그 역시 뛰어난 화기이다. 농부의 생활을 다룬 그림이나 라파엘리처럼 도시 노동자의 삶을 다룬 그림을 그리는 일에는 자케나 뱅자맹 콩스탕 류의 세밀하게 다듬어진 그림을 그리는 것과는 다른 어려움이 있다."

롤이 그린 광부들의 파업 장면, 다냥 부베레, 브르통, 드 그루, 헤르코어의 인물화들은 빈센트가 볼 때 위대한 예술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는 바스티앵 르파주나 그 계승자들에 대해 전적인 동의를 표하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농부들을 다룬 그들의 목가적인 인물화들이 본의 아니게 사람들로 하여금 파리의 변두리를 연상시키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그는 '레르미트의 삽질하는 여인의 그림' 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얼마나 생생하고, 얼마나 진실된가! 마치 그림을 그릴 줄 아는 농부가 직접 그린 그림 같지 않은가." 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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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그림 이야기 - 편지



편지

반 고흐가 쓴 편지 대부분은 동생 테오에게 보낸 것이다.
"항상 네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니 네게 자주 편지를 쓰는 게 놀라울 것도 없다."

최초의 편지는 1872년 8월에 씌어졌고, 자신이 죽는 날에도 동생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냈다.
빈센트는 네덜란드어, 영어, 불어로 씌어진 편지 668통을 테오에게 보냈다. 또한 여동생 빌레미나와 친구들에게도 정기적으로 편지를 썼다.

1881년에서 1885년 사이에 반 라파르트에게 보낸 편지가 58통, 에밀 베르나르에게 22통, 물론 시냐크, 고갱, 오리에에게 보낸 편지들도 있으니, 모두 합하면 800통이 넘는 엄청난 양이 된다.

반 고흐는 동료들과 작업에 대한 소식을 교환하고 정보를 주고 받으면서 서로의 활동을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또 테오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는데, 단순히 돈 부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관심과 염려를 청하는 것이었다.

그는 매일매일의 성찰이나 예술과 자신의 정신 상태에 대한 생각들을 써보냈다.
그 속에서 명민하게 스스로의 마음을 분석했고, 여러가지 계획을 세웠으며, 자신이 처한 경제적 상황과 주변 사람들, 읽은 책들에 대해 설명했다.

좋아하는 그림이나 화가들에 대해 끊임없이 언급하던 편지들을 통해서 그의 세계관과 작업이 풍부해졌다. 그는 자기 그림에 대해 감탄할 만한 설명을 써보냈는데, 가끔은 스케치를 동봉하기도 했다.

편지에는 그의 야망들뿐 아니라 회의도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편지는 그의 일기와도 같다고 볼 수 있다.

그의 편지는 자유롭고 독자적인 스타일로 그의 이미지를 구성해주는데, 여기서는 창조적 광기의 신화와는 아주 동떨어진 모습의 반 고흐를 볼 수 있다. M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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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그림 이야기 - 오베르의 교회



오베르의 교회

반 고흐는 오베르에서 정원과 밀밭, 농가, 성 등을 그렸다.
그는 도비니의 자취 속에서 그런 소재를 다루었고 기꺼이 풍경화로 돌아왔다.

생레미 시절, 북프랑스로 돌아가고 싶어하던 그는 기억을 더음어 브라반트 지방과 우아즈 강 유역을 상기시키는 소재를 담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6월 초 여동생 빌에게 쓴 편지에 이렇게 전하고 있다.
"나는 이 마을의 교회를 다룬 커다란 그림을 완성했다. ... 아직은 누에넨에서 오래된 탑과 묘지를 그렸던 습작들과 마찬가지인데, 단지 요즘의 그림은 극단적인 색채를 사용하여 더 화려해졌다는 차이가 있다."

반 고흐는 뤽상부르 미술관에 있는 밀레의 <그레빌의 교회L' Eglise de Greville>를 참조하기도 했다.
<오베르의 교회Eglise d'Auvers-sur-Oise>는 반 고흐가 후기에 그린 90여 점의 그림들 중 가장 야심찬 작품들 중 하나이다. 그는 들판과 짚더미의 '해방된 인상주의' 를 넘어서면서 향토색에서 벗어났고 보색을 많이 사용했다.

구름 한 점 없이 펼쳐진 짙은 코발트 블루의 단조로운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교회 건물은 보랏빛을 띠고 있다. 유리창은 군청색의 푸른 점처럼 보이고, 지붕은 보라색인데 부분적으로 오렌지색을 보인다. 전경에는 꽃이 핀 초목들과 햇빛을 받아 분홍색으로 반짝이는 모래가 있다."

단조롭게 채색된 구성 위로 방향을 지시하는 것 같은 붓질이 두드러지고, 빛과 그늘이 있는 부분은 하늘의 불투명한 층까지 이어진다. 뒤쪽에서 바라본 교회는 윗부분이 눌린 듯하고 웅장한 모습으로 과장되었으며, 마치 캔버스의 파란색 바탕에 달라붙어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림 속의 공간은 슬쩍 비켜서면서 길을 이어가고 인물을 받쳐준다.
버팀벽에서 종탑에 이르기까지의 데생은 구불구불하여 반향을 남긴다.

이 그림에서 반 고흐는 자연주의와 표현성, 통합과 분할, 위안과 '노동에 대한 숨겨진 열광' 등 자신의 모순에 직면하고 있는 듯하다. 항상 근대적인 방법을 모색하는 일에 집착했던 덕분에 그는 진정으로 독창적인 작품, 단순화와 긴장으로 인해 강한 힘을 갖게 된 이미지를 후세 사람들에게 물려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베르의 교회>는 신비신학적 해설에서부터 정신분석학적 논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켜왔다. M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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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그림 이야기 - 황금빛 밀밭 with 사이프러스나무



황금빛 밀밭

"사이프러스나무는 늘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것을 소재로 해바라기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 사이프러스나무는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처럼 아름답다."

생레미의 정신병원에서는 반 고흐가 보호자 한 명을 동반하고 야외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는 사이프러스나무들이 경계를 이루는 밭들, 끊임없이 변하면서도 균형 잡힌 모습, 환한 밀밭과 선명한 개양귀비꽃들, 그리고 푸르게 꿈틀대는 하늘을 배경으로 드러나는 그 '검은' 실루엣에서 영감을 얻으며 들판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사이프러스나무가 서 있는 밀밭Champ de ble avec cypres>, <황금빛 밀밭Les Bles jaunes>

또한 하늘을 공격하기라도 하려는 듯 어두운 불꽃을 일렁이며 위로 뻗어오른 사이프러스나무만을 따로 습작하는 일에 전념했다.

칠의 두께가 점점 더 두꺼워지는 그림의 스타일은 <별이 빛나는 밤La Nuit eroilee>에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빈센트는 "오래된 숲의 선들처럼 비틀린" 선이라고 표현했다.

그 그림에서는 세상의 종말을 연상케 하는 황량하고 짙은 파란색 하늘 위로 구름이 소용돌이치며 떠 있다. 마을 위로 떠 있는 달과 별이 부옇게 확산된 사프란색과 오렌지색으로 하늘을 장식하고 있다.

사이프러스나무는 그런 정경을 배경으로 부각된다.
1890년 5월에는 별이 빛나는 밤의 사이프러스나무 <사이프러스나무가 서 있는 길La Route aux cypres>(오테를로, 크롤러 뮐러 미술관)라는 소재를 비연속적이고 동적이며 격렬한 필치로 다시 다루었다.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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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그림 이야기 - 붓꽃



붓꽃

1889년 생레미의 정신병원에 도착한 반 고흐는 붓꽃과 라일락을 소재로 연작을 그렸다.
생폴 드 모솔 정신병원의 정원에 있는 꽃이 활짝 핀 화단을 무성한 초목처럼 묘사하면서 캔버스를 다르게 채색된 영역으로 나누었다.

<붓꽃Les Iris<은 앵데팡당전에서의 성공을 가져다 주었다.
그 후 1890년 5월 끔찍한 발작에서 회복 됐을 때, 빈센트는 왕성한 창작열에 불타는 시기로 접어들었다. 이 시기의 문을 연 것이 바로 정물화였다.

"요즘은 거대한 보라색 붓꽃을 다룬 그림 2점을 그리고 있다. 그 중 하나는 분홍색 배경에 초록, 분홍, 보라색의 결합으로 조화롭고 부드러운 효과를 내고 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다른 그림도 (카민색과 프러시안 블루로 보일 정도의) 보라색 붓꽃 다발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앞의 그림과는 반대로 눈부신 레몬색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서로 다른 색조의 노란색들이 칠해진 화병과 화병받침 속에서 그 보라색이 부각되어 엄청난 부조화의 보색 대비 효과를 내고 있다."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같은 시기에 그려진 듯한 장미 그림들도 캔버스를 수평으로 나누고 있다는 점에서 수평선과 수직선 형태의 유사한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장미 그림들은 벨벳처럼 부드러운 꽃잎의 물결과 잎들의 뻣뻣한 조직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빈센트가 보색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음을 보여준다.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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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그림 이야기 - 까마귀가 나는 밀밭



까마귀가 나는 밀밭

반 고흐는 마치 농부처럼 밀의 성장 과정을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그런 그의 마음은 성경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밭에 씨를 뿌리는 자가 곡식을 거두는 것처럼, 영혼에 씨를 뿌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얻으리라", "어린 밀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을만큼 순수하고 부드러운 어떤 것을 나타내며, 잠들어 있는 어린아이에게서 느낄 수 있는 것과 흡사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는 글에서 볼 수 있듯이 밀밭이 삶을 상징한다면, 그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은 죽음을 상징하는 <밀밭에서 수확하는 사람들Le Moissonneur dans un champ de ble>(1889,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이 될 것이다.

빈센트는 화가로서의 작업을 "내게 있어 습작을 하는 일은 밭에 파종을 하는 것과 같고, 그림을 그리는 일은 수확과도 같다" 라는 말로 표현하곤 했는데, 아마 그보다 더 나은 비유를 발견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죽음은 탄생과 함께 반 고흐의 작품 세계에서 중요한 상징이다. "거기서 나는 죽음의 이미지를 발견한다. 사람들이 베어들이고 있는 밀이 바로 인류인지도 모른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러므로 전에 그리려 애썼던 씨 뿌리는 사람과는 반대된다고 해야겠지. 하지만 이 죽음 속에 슬픔은 없다"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 1889).

생레미의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그는 자기 방의 창문을 통해 낮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근처의 밀밭을 내다보면서 하나의 연작을 이루는 그림들의 영감을 얻었다.
1889년 9월초에서 11월 중순까지 하루의 서로 다른 순간들에 보여진 정경을 4번이나 그렸다.

그는 밀의 성장 과정을 통해 계절을 표현했는데, 각각의 계절에 적합한 구성과 가장 잘 표현 할 수 있는 색조에 염두에 두면서 작업했다. 오베르에서는 평소와는 다른 크기의 캔버스에 "불안스레 흐릿한 하늘 아래로 밀이 방대하게 펼쳐져 있는 ... 거대한 밀밭" 을 그렸다.

<까마귀 나는 밀밭Champ de ble avec corbeaux>은 반 고흐의 죽음에 대한 상징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렇지만 그 어디로도 이를 수 없는 길이나 위협적인 하늘이 밀의 성장을 방해할 수 없듯이 까마귀들도 밀이 익어가는 것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한편 빈센트는 "내가 건강과 힘을 주는 시골의 모습이라 생각하는 것을 이 그림으로 너희들에게 보여줄 수 있으리라" 라고 믿었다. 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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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그림 이야기 - 빈센트의 방


빈센트의 방

낮동안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느라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온 반 고흐는 동생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다시 기력을 회복했다. 두 눈은 아직도 피곤하지만 머리 속에 새로운 그림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림의 대략적인 스케치를 동봉한다. 늘 그렇듯 30호 캔버스에, 이번에는 내 침실을 그린 그림이다."
1888년 10월 16일 아를에서 쓴 편지다.

그가 남프랑스의 아틀리에로 만들고자 했던 노란집은 마침내 준비를 끝냈다.
그의 방은 '네모지고 커다란 가구들' 을 갖춘 '극도로 단순한' 모양이었고, 고갱의 방은 '커다란 노란색 해바라기' 그림들로 장식되었다. 얼마 뒤 반 고흐는 친구 고갱의 도착을 기다리게 되었고, 자신이 그의 내면뿐 아니라 그림 양식에도 끌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고갱은 '더 남성적이고 더 단순한 ... 표현 양식을 추구' 하며, '점묘법이나 선영(線影, hachure, 그림자를 표현하기 위해 좁고 평행하게 그어진 선:역자)들은 사용하지 않고 오직 서로 조화를 이루는 단색들만 사용' 한다.

반 고흐는 자신의 방을 그리면서 유독 색채의 구성에만 집착했다.
창백한 보랏빛의 벽, '신선한 버터처럼 노란' 의자들, 진홍색 담요와 파란색 세숫대야.

"그림자나 미묘한 음영은 무시하고, 일본 판화처럼 환하고 명암이 없는 색조로 채색할 것이다."
반 고흐는 이런 식으로 퐁타벤에서 행해지고 있던 조형적 탐색에 나름대로 반응했다.
붓으로 거칠게 칠해진 색은 강렬하고, 전체적으로 보색의 대비가 두드러진다.
공간은 의도적으로 재구성되었고, 소실점을 향해 좁아지는 마룻바닥의 선은 가구들을 끌어당기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풍부한 원근법적 표현은 그 방을 지배하고 있는 질서 덕분에 '쇠라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단순성' 에 필적하고 있다. "단순화함으로써 사물들에 더 많은 스타일을 부여하고 있는 ... 색채" 는 "전체적으로 휴식이나 수면의 ... 인상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이 그림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마음의 상태나 상상력' 에 달려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화가의 본질적인 역할', 즉 "위로 하기 위해 혹은 마음에 더 큰 위안을 주는 그림을 준비하기 위해 존재한다" 는 생각과 일맥상통한다.

반 고흐는 항상 이 그림이 자신의 주요 작품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생레미에 있던 1889년 9월에는 이 그림의 복제품을 2점(파리, 오르세 미술관/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더 그렸다. 그 그림들은 색채와 데생, 벽에 걸려있는 그림들의 종류에 있어서 약간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더 작은 크기의 두 번째 그림은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 빌에게 주는 것이었는데, 그는 항상 자기 그림들 중 최상의 것들을 복제해서 그들에게 주었다. M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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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그림 이야기 - 자화상



자화상

"내 얼굴을 제대로 채색 할 수 있게 된다면 ... 다른 사람들의 얼굴도 그려 낼 수 있을 것이다."


반 고흐는 40여 점의 자화상을 그렸다.
초기 자화상들의 제작 시기는 불확실하지만, 앙베르 시절에도 이미 자신을 모델로 한 그림을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파리에서는 2년이 안 되는 기간 동안 거의 30차례나 자신의 이미지를 그림으로 그렸다.

이 시기의 자화상들에서는 네덜란드 시절 즐겨 사용하던 어두운 팔레트가 환하고 강렬한 쪽으로 변했다.
분절된 붓질은 얼굴에 입체감을 부여해주며, 대조적인 배경은 일종의 채색된 후광을 형성한다.

남프랑스에서는 자화상의 숫자가 줄어들었고, 마지막 작품들은 생레미의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던 시절의 것들이다.

이 자화상들은 그의 회화 양식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발전된 양상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자화상에서 볼 수 있는 용모의 변화를 회화 형식에서의 변화만으로 모두 설명 할 수는 없다. 그의 외모 자체가 변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반 고흐는 인물을 그리는 데 있어 사진에서보다 더 심도 깊은 닮음을 추구했다. 그런데 스스로를 아는 것은 힘든 일이기에 자기 자신을 그리는 것이 용이한 일만은 아니다. 게다가 여동생 빌에게 설명하고 있듯이, '동일한 인물이 아주 다른 초상화의 소재가 될 수 있는 것' 이다.
낭만적인 북유럽 사람으로, 혹은 캔버스를 앞에 둔 화가로, 또 펠트 모자를 쓴 젊은 부르주아나 밀짚모자를 쓴 풍경화가 등등 반 고흐는 의도적으로 자기 외모의 어떤 특징을 강조하여 그렸다.

아를에서는 자신의 개성을 과장하여 그리기도 했다. 짧은 머리, 면도된 수염 등을 통해 '일본인' 처럼 보이기를 원했고, 고갱을 그릴 때는 '소박한 중, 영원한 붓다의 추종자' 모습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 뒤 <귀를 자른 자화상L'Autoportrait a I'oreille coupee>(1889, 런던, 코톨드 인스티튜트 갤러리)에서는 다시 현실 속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 그림에서 반 고흐는 아틀리에의 집기들과 판화, 화판으로 둘러싸인 모습으로 자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수차례의 발작을 겪은 후, 회복한 안정의 표식을 애타게 찾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보면 자화상은 일종의 푸닥거리 같은 것으로, 그는 자기 모습을 그림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회복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차적인 관심이 인물화에 있었던 반 고흐가 자화상을 많이 그렸던 데에는 모델을 구하지 못한 까닭도 있다.
따라서 자화상은 그의 야심을 반영한다.

그는 '인상주의' 라는 통로를 통해 렘브란트에서 시작되는 전시대의 거장들과 만나게 되기를 바랐다.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사람들이 내 작품을 보고, 이 사람은 강렬하게 느꼈고 아주 섬세한 감수성을 타고났다고 말하게 되기를 바란다. 나 자신 저속하다고 부르는 특징들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 때문에 ... " 라고 고백하고 있다. M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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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그림 이야기 - 해바라기


해바라기

해바라기 그림은 반 고흐의 영광과 결부된다.
이 꽃들은 1886년 <꽃들과 해바라기들Fleurs et tournesols>(만하임, 시립미술관)에 최초로 등장했고, 파리 체류 중이던 1887년 말에 가서는 해바라기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는 해바라기 두 송이를 다룬 그림을 3점 그렸다. (암스테르담, 반고흐 미술관/베른, 쿤스트 뮤지엄/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꺾여서 테이블 위에 놓인 독특한 구성의 이 커다란 꽃들은 파란색과 오렌지색이라는 상대적으로 단순한 배경 위에 탐스럽게 그려져 있다.

<네 송이의 해바라기Quatre fleurs de Tournesols>(1887, 오테를로, 크롤러 뮐러 미술관)는 분명 파리 시기의 걸작들 중 하나로서, 빈센트가 구성과 색을 완벽하게 다루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이 그림에서 파란색과 오렌지색의 보색 대비를 이용하고 있는데, 여름 자체를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해바라기 그림에 '엄청난 애정을 보였던' 고갱은 자신의 그림 1점과 빈센트의 작은 그림 2점을 교환 했는데, 그 중 하나를 그의 파리 아틀리에에 걸어 두었다.

아를에 정착한 반 고흐는 1888년 자신의 아틀리에를 여섯 혹은 열두 점의 해바라기 정물로 장식하고 싶어했고, 8월 말에 연작을 시작했다.

고갱을 맞게 되어 기뻤던 그는 친구의 방에 완성된 그림 4점을 걸어두었다. 그들 중 특히 2점을 흡족하게 생각한 빈센트는 1889년 11월 그림에 서명하고 브뤼셀의 20인전에 보냈다. 거기서 이 그림들은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해바라기 그림은 런던의 국립미술관에 있는 <해바라기>이다.
반 고흐는 거기서 가는 선들과 매끈한 붓질을 번갈아 사용했고, 꽃잎과 줄기는 윤곽선을 약하게 하면서 꽃의 노란색 중심부는 이차색으로 구성하는 등 다양한 기술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는 "너도 알겠지만, 자냉에게 작약 그림이 있고, 쿠아스트에게 접시꽃 그림이 있다면, 나에겐 해바라기가 있다" 고 쓰고 있다. 그는 이 눈부신 정물화를 검은 사이프러스 나무에 대칭되는 그림이라고 생각했고, '온전히 노란색, 오렌지색, 그리고 고통으로 남프랑스를 그렸던' 몽티셀리와 프로방스 지방에 대한 찬양의 표현이라고 했다.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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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이야기 - ⅰ. 교회 없는 목사



ⅰ. 교회 없는 목사


a. 복음을 전할 것인가, 그림을 그릴 것인가

목사와 화상의 집안에서 태어난 반 고흐(1853-1890)는 한동안 사제직과 그림 사이에서 망설였다. 구필 화랑에 취직(1874-1876)한 그는 곧 헤이그, 런던, 파리에 있는 미술관들을 방문했다. 유명한 화가들의 복제판화를 수집하기 시작했는데, 그 대부분이 밀레의 작품이었다.

b. 보리나주에서

암스테르담에서의 신학 공부(1877-1878)를 도중에 포기한 반 고흐는 '복음 전도의 사명'을 품고 보리나주로 떠났다(1879). 그러나 그 일에서도 '?겨난' 후 그림으로 방향을 전환했고, 브뤼셀의 아카데미에 입학했다(1880). 어릴 때부터 '연필로 이것저것 그리곤 했던' 빈센트는 열정적으로 데생 수업에 임했고, 많은 책을 탐독했다.

c. 화가 입문

반 고흐는 헤이그(1881-1882)에서 사촌 안톤 모베의 지도를 받으며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883년에서 1886년까지 드렌테의 농촌에서 지내면서 그곳의 풍경을 그렸고, 누에넨의 부모 곁으로 돌아가 <감자 먹는 사람들>(1885) 을 구상했다. 앙베르(안트웨르펜)에서는 아카데미에 다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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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이야기 - ⅱ. 파리의 네덜란드인


ⅱ. 파리의 네덜란드인


a. 코르몽의 아틀리에에서

1886년 5월, 반 고흐는 파리에 있는 테오에게로 가 함께 지내기 시작했고, 코르몽의 아틀리에에서 수업을 받았다. 그는 파리나 그 근교 풍경을 그렸고, 인상파와 신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렸는데, 그에게는 이 두 유파가 동일한 사조의 두 가지 경향으로 생각되었다. 초기의 어둡던 색조에서 벗어나 더 환한 색을 사용하게 되었다.

b. "뒷골목의 인상파 화가들"

반 고흐는 아직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2세대의 젊은 인상과 화가들을 '뒷골목의 인상파 화가들'이라고 불렀다. 1887년 앙케탱 등의 친구들과 함께 클리시가의 '레스토랑 뒤 샬레'에서 작품 전시회를 열었다.

c. 일본, 고갱, 그리고 해바라기

1885년부터 일본 판화를 수집해온 반 고흐는 1887년 일본풍의 작품 3점을 완성했다. 이것은 히로시게와 에이센의 목판화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원색을 사용하고 입체감을 제거한 형태는 같은 해에 제작된 <탕기 영감>에서도 특징적으로 드러난다. 1888년 2월 빈센트는 '일본만큼이나 아름다워 보이는' 아를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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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이야기 - ⅲ. 아를에서 오베르까지


ⅲ. 아를에서 오베르까지


a. 남프랑스의 아틀리에

반 고흐는 세잔과 몽티셀리의 고향 남프랑스에서 풍경화와 인물화 그리기에 전념했다. 파란색, 노란색, 오렌지색, 녹색, 보라색 등 강렬한 색을 사용했으며 대조적인 색채를 즐겼다. 그는 '노란집'을 화가들의 근거지로 만들고자 했고, 자신과 고갱이 그 중심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고갱과의 관계는 1888년 크리스마스 무렵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으로 끝났다.

b. 생레미의 정신병원

신경발작으로 시달리던 반 고흐는 1889년 5월 3일, 생폴 드 모솔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로 했다. 거기서 처음에는 병실 창 밖으로 보이는 정원을 그렸고, 그후 관리인 한 명과 동행하여 들판에서 작업하게 되었다. 구불구불한 그의 화필은 소용돌이 모양에 의해 입체감을 갖게 되었다. 7월에는 여러 점의 자화상을 그리는 일에 착수했다.

c. 북프랑스로의 귀환

반 고흐는 북프랑스로 가면 건강이 회복되리라는 기대를 품고 1890년 6월 가셰 박사가 살고 있는 오베르쉬르우아즈로 ?겨갔다. 거기서 아마추어 화가이자 판화가, 수집가이기도 했던 가셰 박사와 우정을 쌓게 되었으며, 그의 초상화도 2점 그렸다. 반 고흐는 다시 열정적으로 작업에 몰두했으나, 몸이 점점 더 쇠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1890년 7월 27일 그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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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이야기 - 데생


반 고흐와 회화적 성장 과정

DESSINER/ 반 고흐는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서 데생이라는 좁은 문을 통해 회화의 세계로 들어갔다. 그는 틸부르크의 고등학교에서 최초로 그림 교육을 받았고, 그후 구필 화랑에 취직해서도 계속해서 연필로 스케치하곤 했다. 데생 공부에만 전념한 것은 종교적인 사명을 포기한 1879년에서 1880년 사이였다. 보리나주에서는 바르그의 <데생교본>을 보고 혼자 데생 연습을 하면서 밀레 그림의 복제 판화를 모사했고, 광부들을 모델 삼아 그림을 그렸다. 그후 반 라파르트, 모베와 접하면서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카사뉴의 <데생의 기초>는 원근법의 규칙들을 가르쳐 주었다.
헤이그에서는 삽화가들의 영향을 받아 도시적 주제들, 시엔과 그녀의 아이들을 그리는 데 전념했다. 반면 누에넨에서는 직조공과 농부들을 그리는 일에 몰두했다. 반 고흐는 연필은 물론이고, 펜이나 목탄, 흑연도 사용해 보았다. 분필과 수채화 물감으로 채색을 시작했고, 1882년에는 유화를 시작했다. 앙베르의 아카데미나 코르몽의 아틀리에에서도 데생은 그의 수업에서 핵심적인 것이었다. 파리 시절에는 무엇보다 유화에 집중했지만, 남프랑스로 왔을 때는 돈이 부족해서 다시 데생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갈대를 깎아 만든 펜으로 <크로 지방의 들판La Plaine de la Crau>(1888,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생트마리 지역, 그리고 후에는 병원의 정원까지 다시 그렸다. 그 그림들은 놀랄 만큼 다채로운 필치로 원근감 있는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또한 반 고흐는 교환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그림들을 본뜬 데생을 하기도 했고, 편지에 스케치를 그려넣기도 했다. 독립적인 작품으로든 작품의 '밑작업'으로서든 "항상 긴급히 해야 할 일은 데생을 하는 것" 이었다. M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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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이야기 - 수집



 

 

화가의 미술관, 이동식 미술관

COLLECTION/ 반 고흐는 어디를 가든 주위를 이미지들로 둘러쌌다.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할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개선되기 때문이다." 그는 당대와 전시대의 거장들의 복제판화, <월렌슈피겔Uylenspiegel>에 실린 벨기에 석판화(롭스 Rops, 드 그루), <일뤼스트라시옹L'Illustration>에 발표된 프랑스 석판화를 수집했다. 삽화가로서 생계를 꾸려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랐던 빈센트는 '배우기' 위해서라는 말로 목판화 매입을 정당화했고, 결국 1,500여 점의 판화를 수집했다. 헤이그에 머무는 동안 반 고흐는 <런던 일러스트레이티드 뉴스London Illustrated News>에 작품을 싣는 영국 삽화가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83년에는 이미지를 찾기 편하게 하기 위해 <그래픽Graphic>지 스물한 권을 분해하기도 했다. 그 판화들은 반 고흐의 예술에서 중대한 비중을 차지한다. 파리 시절에는 앙베르에서 처음 접한 일본 판화를 열정적으로 수집했다.
테오도 1884년부터 작품 매입을 시작했는데, 어떤 그림들은 그 두 형제의 공동 소유였다. 빈센트는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몽티셀리의 그림에 대해 "우리가 5점을 가지고 있다"고 쓴 적이 있다. 그는 고갱, 에밀 베르나르, 라발, 피사로, 러셀, 툴루즈 로트레크, 보흐 등 친구들과 그림 교환을 함으로써 동생의 미술품 수집에 기여했다. 이렇게 해서 수집된 방대한 그림들은 오늘날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 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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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이야기 - 아카데미


배움과 망각

ACADEMIE/ 1880년 7월 처음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반 고흐는 혼자서 필요한 기술을 익히려고 했으나 차츰 누군가의 지도를 받을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원하는 소재를 그림으로 그릴 수 있으려면 비례, 광선, 음영, 원근법 등에 대한 여러 규칙을 꼭 알아야만 한다."


브뤼셀의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기록을 보면 1880년 7월 15일자로 그의 이름이 '고대미술 데생-흉상 및 각 부위' 과정에 등록되어 있다.

그는 "수업은 무료이고… 우리는 적절한 조명과 난방을 갖춘 곳에서 작업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브뤼셀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너무 부담이 컸다.
1881년 봄이 되자마자 에텐으로 가서 혼자 작업하다가, 헤이그에서 모베의 지도를 받으며 풀크리 스튜디오의 무료 수업을 받았다. 반 고흐는 아카데미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카데미의 수업이 일상 생활 속의 사람을 그리고자 하는 그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카바넬류의 그림들'과 '들라로슈풍의 그림들'에 대해서는 경멸감밖에 가질 수 없었다.


그럼에도 1885년 11월에는 다시 앙베르의 미술 아카데미에 들어가지만 곧 그곳의 교육이 안고 있는 속물적인 제약들에 반항하기 시작했고, 1886년 2월 말에는 파리로 와서 한동안 코르몽의 아틀리에에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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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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