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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려

시애틀항해일지 2015. 1. 7. 22:02

 

우리는 기다림의 장소에서, 이 가혹한 시련과 역경에서 제발 건져달라고 빨리 건져달라고 하나님께 애타게 부르짖는다. 하지만, 당장에 응답이 없을 때 쉽게 절망과 무기력에 압도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시편 40편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당신은 기도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듣지 않는 것 같다.

당신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속 당신을 실망시키는 것 같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들은 당신 삶에 공허한 약속처럼 보인다.

당신은 힘써 찾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문을 두드리지만 안에서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하나님께서 당신 삶에서 무엇인가를 행하시는 것 같지가 않다.

믿음의 싸움은 나날이 격해진다.

하나님은 매번 늦으실뿐 아니라 심지어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신다.

하나님은 세상의 다른 일들에서 신경쓰시니라 너무나 바빠서 나의 인생에 전혀 신경을 쓰시는 것 같지 않다.

 

시편 119:82

나의 말이 주께서 언제나 나를 안위하실까 하면서 내 눈이 주의 말씀을 바리기에 피곤하니이다.

 

시 69:3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나의 목이 마르며 나의 하나님을 바라서 나의 눈이 쇠하였나이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 그것은 무엇보다 더 가혹하게 우리의 믿음을 시험한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돕기 위해 나타나기 바로 직전에 우리가 기다림을 포기 한다는 데 있다.

C.S.Lewis <스크루테이프 편지>

인간의 말보다는 내적인 결심이 중요한 거야. 따라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다 견디겠다고 결심하게 만드어서는 안돼. 대신 합당한 시간에만 견대겠다고 결심하게 만들어야 해.

그리고 그 합당한 시간을 믿음의 시험이 지속되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보다 더 짧아지게 해야해. 많이 짧아지지 않아도 괜찮아. 인간의 인내심과 고결함과 용기를 파괴하기 위한 공격에서 재미있는 것은, 구원이 거의 시야에 들어온 바로 그 순간에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니까. 설령 인간들이 그것을 알고 잇다고 해도 망리지

 

우리는 빛이 어둠을 뚫고 들어오기 직전에 기다림을 포기하기 쉽다. 찰스 스펄전 목사는 말한다.

‘광야는 약속의 땅에 이르는 길이다. 패배는 승리를 준비시켜준다. 가장 어두운 밤이 지나야 동이 튼다.’

 

지금, 가장 어두운 시기를 지나고 있는가? 기억하라! 어떻게든 새벽이 온다는 것. 빛이 비치리라는 것을 꼭 기억하라! 하나님께서 절망스런 환경을 허락하신다면 우리를 위한 분명한 계획과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성경적으로 ‘가만히 있는 것’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다르다.

원수마귀는 기다림의 장소는 쓸데없다고 믿기를 바란다. 믿음은 말한다. ‘기다림의 장소는 기도의 장소’이다.

절망스런 운 상황에 있는가? 명심하라. 하나님이 당신을 잊어신 것도 아니다. 버리신 것도 아니다. 당신의 심령을 겸손케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손길이다. 당신이 산산히 깨지고 부서졌을 때, 가장 강력하게 역사하신다.

우리가 산꼭대기 인생에 서 있을 때, 하나님의 측량 할 수 없는 사랑과 능력의 힘을 제대로 깨달을 수 없다. 가장 어두운 날, 가장 곤고한 밤, 가장 깊은 골짜기에 갔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부인할 수 없는 존재를 깨닫는다.

 

약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당신이 바닥으로 추락하여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때, 그때 하나님께서 위로 올라가 무엇인가가 되신다.

영혼의 공허함 아픔, 눈물과 끝없는 기다림으로 변장한 하나님의 은혜가 상상도 못했던 방식으로 하나님을 목격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데려가시는 중이다.

씨앗이 자라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사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씨앗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컴컴한 땅 아래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당신에게 영양분을 공급하시고, 강하게 하여 남은 과정을 견딜 수 있도록 깊은 뿌리를 가꾸어주신다. 우리는 작은 꽃으로 자라길 바라나, 하나님은 우리를 생명빛 나는 장미로 가꾸어가신다.

 

신자는 과거에 받은 축복을 기억함으로 눈 앞에 닥친 시련을 이길 힘을 얻는다. 우리는 이전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했기에, 구분을 잠잠히 신뢰할 용기를 얻는다.

 

시인은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 빠졌다. 적들에 의해 우물에 내려졌고 진흙탕에 빠졌던 예레미야(렘 8:1-13)처럼 글자 그대로 웅덩이와 수렁에 빠졌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웅덩이와 수렁은 죄 침울함 질병 괴로운 경험의 상징이다. 시인은 그곳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혼자 힘으로 빠져 나올 수 없다.

그는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하나님은 먼저 그 시인의 외침을 들으신다. 몸을 굽혀 그를 구덩이에서 꺼내신다. 그의 발을 안전한 바위위에 두시고, 마지막으로 그의 입에 찬양의 새노래를 두셔셔, 많은 이들로 믿게 하신다.

예배는 말로 하는 선포 그 이상이다. 예배는 제물을 드림 그 이상이다. 순종의 삶으로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삼상 15:22

순종은 두루마리 책, 곧 기록된 율법이 명령하는 바다. 순종은 하나님이 ‘통하게’하신 ‘귀’에서(6절) 시작한다. 문자적으로는 ‘뚫어’ 그 분의 뜻을 듣고 이해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우리의 심장에 율법을 새겨주셔서 우리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게’(8절)하셨다.

 

끈질기게 구원을 기다리는 자기 백성의 부르짖음 들으신다. 사망의 자리에서 안전과 안정의 자리로 옮겨주신다. 답답하고 숨이 막혀 곧 죽을 것 같은 고난으로 힘겨운가? 그렇지라도 우리는 천지를 지으신 분의 자녀다. 손쉬운 해결책을 찾기 보다 우리의 시작과 끝이신 하나님을 기다리자.

찬송을 우리 입에 두셨다. 찬송과 감사는 어디서 나오는가? 감정 아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받은 것이다. 그러니 찬송은 또 하나의 순종이다. 그런 찬양만이 진정으로 듣는 이들로 여호와를 두려워하고 의지하게 한다.

 

시인은 제사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즐거이 따른다. “내가 왔나이다.” 그 말씀을 마음에 담아 준행하겠다고 다짐한다. 우리도 영혼의 “귀를 뚫어” 말씀을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하자.

습관적인 묵상의 껍데기를 벗고 깨달음대로 기꺼이 순종함으로, 말씀을 심비(心碑고후 3:3)에 잘 새겨 늘 주님과 동행하는 봄날을 누리자.

우리를 위하시느라 생각이 많으신 하나님. 어찌 근시안적이고 우둔한 우리 생각에 비하겠는가? 오늘 내가 겪는 곤경도 하나님의 무관심의 표현이 아니다. 우리는 도무지 셀 수 없는 그 많으신 그분의 생각의 결과이다.

 

시인은 여전히 자신이 ‘가난하고 궁핍하지만’ 지금까지 그를 건져주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를 돌보고 계시고, 또한 앞으로도 그를 건지실 것을 믿는다(17절)

 

우리를 하나님이 기가 막힐 수렁에서 건지셨던 때는 언제인가? 그 때의 기억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참고도서

1. 매일성경전집 성서유니온 p.118.

2. 존스토트 ‘내가 사랑한 시편’ 포이에마, pp.94-99.

3. 체리힐 ‘기다려’ 규장, pp.1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