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신비극
김광영
Ⅰ. 중세와 종교극
‘중세’라는 표현은 15세기 중반 이후 인문주의 문헌학자들에 의해 부쳐진 명칭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들은 고대와 자신의-고대를 숭상하는-시대 사이의 시대를 ‘중간 지대’라고 불렀다. 이때 중세라는 말은 고대가 아닌 시대로서 사이에 낀 시대라는 의미였다. 호르스트 푸어만, 안인희 역, ‘중세로의 초대’, (서울: 이마고, 2004), p.33
중세는 암흑시대(Dark age)라는 인식으로 인해 사회, 문화의 제 측면들이 부정적인 판단을 바탕으로 인식되어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중세인들의 세계관에 의한 중세는 신 중심의 세계관에 의한 지상천국의 구현, 또는 장차 올 영원한 세계에 대한 준비단계로써 이해된다. 따라서 현대인의 세계관과는 전혀 다른 관점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연극의 경우, 이러한 세계관의 부정적 영향 아래에서 지금까지의 중세 연극에 관한 연구는 자료와 연구의 부족으로 인해 주로 희곡을 중심으로 하는 희곡연구가 중심이었다. 전례극(예배극, Liturgical Drama)과 신비극(Mystery Play), 기적극(Miracle Play), 도덕극(Morality Play)들은 겨우 그 내용만 알려져 있을 뿐 그 자세한 공연의 내용과 무대기술의 실제 등은 많은 부분이 아직도 연구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중세 종교연극은 무대기술 상의 독특한 장치들과 특유한 세계관으로 인해 많은 볼거리와 풍부한 내용을 가진 연극이었다. 중세 종교연극의 규모와 내용이 풍부함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 중의 하나로는 그것이 대략 300명 이상이 참여하는 종교극이 대부분이었고 그 제작의 주체들이 상인 길드와 교회, 지역사회가 총체적으로 참여하는 전 사회적인 행사였기 때문에 그 규모와 볼거리를 능히 추측 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교회는 도시와 마을에서 교회의 건물이 차지하고 있는 것과 똑같이 중세시대에 있어서 삶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교회를 중심으로 한 초기의 종교연극과 교회를 벗어난 후기의 종교연극까지도 모두 당시 사회의 중요한 행사였다.
_김대현(호서대교수, 연극영화학부), 1999, 중세 종교극이 무대화에 관한 연구-공연형태와 무대의 사적 변모와 발전을 중심으로, 한국연극학 14호, pp,217-218
중세극은 “보이지 않는 말”의 “보이는 말”로 진화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로고스’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고대 이래로 인간에게 중요시 여겨져 왔던 진리로서, 기독교 세계에서는 “신(神)의 말”이라는 형태로서, 그리스 로마를 위시한 그리스 사유영역에서는 ‘로고스’라는 진리의 형태로 각기 강조되어 왔다. 필론(Philon)은 “참”을 말하기만 하면, 나무에서도, 돌에서도 진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하며 무시간적 로고스를 강조했고, 중세의 성직자들은 천 여년에 걸쳐 그들이 지켜온 예배의식을 통해 “하나님의 말”을 강조하고자 했다.
이 “하나님의 말”은 중세 교회에서 “보이지 않는 말”과 “보이는 말”의 두 가지 형태로 제시되었다. 한가지는 “보이지 않는 말”로서 예배의식 전체를 흐르고 있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보이는 말”로서 성만찬(Eucharist) 의식의 빵과 포도주로서 나타났다. 중세의 성직자들은 어느 시점에 와서 이 “신의 말”이 이미 인간에게 그 생동력과 호소력을 잃고, 죽은 말로 남겨지게 되었음을 목격하게 되었다. 이때, 그들은 이 보이지 않는 “신의 말”이 “보이는 말”로 바뀌어져야 할 필요성을 피부로 체험하게 된다. 청각에만 겨냥하던 “신의 말”은 이제 직접 두 눈 앞에 전개되는 구체적인, “가시화된 말”-인간들이 사용하는 말-인간들에게 통용되는 말로 바뀌어지게 된다. 이 현상이 최초로 일어난 것이 AD 935년 한 부활절 미사 때였다. _김 한(동국대교수), 중세극 고찰-중세의 현대의 신비극 공연을 중심으로, 한국연극학 제4호, pp.105-106
Ⅱ. 중세종교극의 배경과 변천사
1. 역사적 배경
이른바 중세의 서유럽 문명은 로마 제국의 제도와 크리스토 교회의 종교, 그리고 로마인이 만족(barbarians)이라 부르던 여러 종족의 문화가 혼합되어 이루어진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B.C 31~A.D 14)가 기초한 로마제국의 제도는 디오클레티아노스가 즉위한 284년에는 몰라볼 정도로 변질되어 있었다. 그 뒤를 이은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306~337)는 옛 제국과 크게 다른 새로운 제국을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바로 이 후기 로마 제국의 문명이 점점 더 기독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만족, 특히 게르만(German)과 켈트(Celt)족의 문화가 혼합됨으로써, 초기 중세 세계가 형성되게 되었다. 브라이언 타이어니, 시드니 페인터, 이연규 역, ‘서양 중세사-유렵의 형성과 발전’, (경기도 파주: 집문당, 2015), p.19
중세 종교극은 로마연극의 폐허 속에서 태어났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313년)은 지배계층의 기독교화를 달성했고 이것은 연극의 적대세력의 증가를 의미했다. 왜냐하면 로마의 연극은 이전의 그리스의 고급연극을 모방하는 정규연극보다는 대중의 흥미와 인기에 좌위되는 일반 연희물(검투, 전차경기, 수상전투게임 등)에 더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연극의 경우에도 정규연극보다는 기타의 군소 장르들(마임, 판토마임)이 더 인기가 있었다. 이후 로마시대의 종언과 함께 시작된 중세는 막강한 기독교 윤리와 세력이 그 영향력을 행하던 시기였고, 이 시기에 연극은 당연히 로마시대의 문란한 풍습과 연결되어 이후 약 600년 동안 표면으로 솟아오르지 못하게 된다.
경직된 상황은 중세 중기에 접어들면서 변하기 시작한다. 공통어로써 라틴어를 사용하던 중세는 라틴어를 알지 못한 일반대중에게 기독교의 교리와 성경을 보다 쉽게 알려 줄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고, 이러한 필요성은 곧 예배 중에 성경에 나타난 예수의 생애를 간단한 시연을 통해 보여 주고자 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예배극 또는 전례극(Liturical Play)이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예배극의 대본은 예수의 부활에 관한 것이다.
_김대현(호서대교수, 연극영화학부), 2000, 새 천년의 기독교 문화와 연극-보이는 것을 통한 보이지 않은 연극의 추구를 향하여-, 통합연구 13권 1,2호. pp.81-83
신약과 구약의 중요한 행사들-대림절, 성탄절, 사순절, 부활절, 오순절, 주현일, 성체축일 등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교회력은 연극 행사가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사순절은 교회 예배에서 연극이 행해지는 첫 번째 행사였다. 현존하는 가장 오랜 사순절 미사 전례문의 장식어구는 ⌜퀴엄 쿠리에라티스(Quem Quaeritist-라틴어 “누굴 찾느냐”)⌟이다(약 925년).
_밀리 S. 베린저, 우수진 역, ‘서양 연극사 이야기’, (서울: 평민사. 2001), p.53
[그림 1] 중세 연극의 연출가 ‘메네르 뒤주’는 ‘수난극’의 축소판에서 발췌한 것으로, 이는 중세 수난극 리허설 기간 동안 ‘연출가가 활약했음을 보여주는 최초의 기록이다. ’연출가‘ 한 손에는 대본을, 그리고 다른 한손에는 지휘봉을 들고 뭔가를 ’연출‘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_ Edwin Wilson, Alvin Goldfarb, 김동욱 역, ‘세계연극사’, (서울: HS MEDIA, 2008), p.158
2. 종교극의 발전과 변화
예배에 덧붙여졌던 간단한 연극은 성서 내용을 주제로 하는 좀 더 복잡한 연극으로 발전해갔다. 이러한 연극은 그리스도교 세계전체로 퍼져나가 신도들을 끌어들였다. 연극이 예배와 분리되면서 처음에는 엄격하게 상징적이던 연극 방식도 변하기 시작했다. 부활절 축제에서 암시적으로만 표현되던 그리스도는 감정적으로 실감되어야 한다는 추세에 부응하여 말하고 행동하는 인물로 등장하게 되었다. 13세기 무렵에는 종교연극의 무대가 교회 내부에서 교회 광장으로 옮겨갔으며 등장인물들은 더 이상 라틴어로 노래하지 않고 다양한 민중어로 말하였다. 안드레아 그로네마이어, 권세훈 역, ‘즐거운 지식여행 003_Theater 연극’, (서울: 도서출판 예경, 2005), pp.38-39
중세 종교극의 잘 알려진 형태는 신비극(비적극 Mystery Play), 기적극(Miracle Play), 그리고 도덕극(Morality Play)의 세 가지 형태이다. 이 중 신비극은 예수의 생애에 관한 에피소드들을 주로 내용 삼아 공연했고 기적극은 성자들과 성경의 영웅, 위인들의 생애와 사건을 극화했다. 마지막으로 도덕극은 성경의 테두리를 넘어 신앙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을 우화적인 인물을 통해 표현했다. 김대현, 새 천년의 기독교 문화와 연극, 재인용, p.83
신비극은 다름 아닌, 중세 미사의 “빵과 술”을 먹고 마시는 행위에 근원을 두고 있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예수의 최후의 만찬이 시발점이 된 이래, 오늘날에도 여전히 카톨릭 미사에서 전수되고 있는 이 의식은 정신적인 것만의 강조가 아닌, 육체적인 것까지 합해진 인간 전체를 문제로 삼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후기 중세 문학이 이룩한 최고의 영광의 하나로서, 가장 폭넓은 극적인 성취라고 할 수 있는 중세의 신비극은 극적 효과에 있어 성공적이고 그 문학적 표현이 강력하여 이후의 극작가들(세익스피어 등)의 작품에 엄청난 형식을 영향을 끼치고 있다. 김 한, 중세극 고찰, p.107
현존하는 최고(最古) 예배극은 서기 925년에 제작된 것으로 부활절 미사 때 행해진 것이다.
천사들 : 오 성도들이여, 너희는 무덤에서 누구를 찾느냐?
세 명의 마리아들(Mary) :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찾습니다, 오 신령한 존재들이여.
천사들 : 그는 여기에 없다. 그가 전에 말한 것처럼 그는 부활했다. 가서 그가 무덤에서 부활했다고 전하라.
이와 같은 단순한 형태의 공연은 10세기 말에는 유럽 전역에 보편적인 현상이 되고, 신비극, 기적극, 도덕극 등으로 계속 확장, 발전하게 된다. 1200년경에 이르면 공연장소도 교회 안에서 점차 교회 밖으로 나가게 되고 따라서 제작의 주체도 교회에서 세속의 단체들, 예컨대 상인조합(Trade guild) 처음에는 대개의 도시에 수공업자와 상인 모두를 구성원으로 하는 하나의 길드만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두 집단은 분리되어 갔다. 상인은 수공업자에 비해 많은 돈을 벌수 있었고, 더 부유해졌다. 결과적으로 수공업자들은 길드를 이탈하여 그들끼리 수공업자 길드를 형성하였다. 그리하여 원래의 길드는 상인 길드가 되었다. 길드는 그 구성원을 장사지내고, 유가족을 돌보았다. 또 길드는 길드 생활의 종교적 측면을 행하는 종교적 단체로서 기능하기도 하였다. 샤르트르 성당 중앙부에 있는 그 휼륭한 착색유리(stained-glass)는 그 도시의 여러 길드가 돈을 대어 만든 것이었다.
_브라이언 타이어니, 시드니 페인터, 이연규 역, ‘서양 중세사’, (경기도 파주, 집문당, 2008), p.280
나 도시 당국 또는 종교극의 제작과 공연을 위한 특수단체들에게로 변하게 된다.
성채며 교회며 도시가 바로 극장의 무대 역할을 했다. 중세 사회에 전용극장이 없다는 것은 징후적이다. 사회 생활의 중심지가 있는 곳이며 어디서나 즉석에서 무대를 만들어 연극을 상영했다. 교회에는 종교 의식이 축제였고 따라서 매우 짧은 극은 예배극에서 유래했다.
_김대현, 중세 종교극의 무대화에 관한 연구, 재인용, pp.221-222
특이한 것은 각각의 ‘길드’들은 각기 자신들의 특성에 맞는 장면의 제작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천지창조는 미장이 길드, 방주 제작은 조선공 길드, 노아 홍수의 제작은 생선장수나 선원 길드, 목자들의 찬송은 양초제조 길드, 메어리의 찬송은 금속공예 길드, 이집트로의 도피는 마구 및 편자를 만드는 길드, 최후의 만찬은 제빵 길드, 십자가 체험은 그림쟁이 길드, 그리스도의 변화는 도착과 새장수 길드”에서 담당하였다. 김대현, 중세 종교극의 무대화에 관한 연구, p.225
중세도시의 일반적 형태를 보면 이와 같다. 도시의 가장 중요한 건물은 교회였는데, 교회 건물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아 예컨대 1200년경 런던에는 120개의 교회 건물이 있었을 정도였다. 성당 교회가 있는 도시에는 성당 건물이 시민의 자랑이자 영광으로서 다른 건물을 압도하고 있었다. 성당과 함께 수많은 부성당(副聖堂-성당처럼 규모가 있지만, 주교좌가 없다)과 수도원 교회,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교구 교회가 있었다. 교회의 첨탑은 멀리에서 본 도시의 모습에서 가장 눈에 띄는 광경이었다.
_브라이언 타이어니, 시드니 페인터, 이연규 역, ‘서양 중세사’, (경기도 파주, 집문당, 2008), p.282
공연의 장소와 시기의 변화는 이미 1200년대에는 중세 종교연극의 공연장소가 교회 외부로 바뀌었고, 또 1400년대에 이르면 이미 옥외공연에 익숙해져 중세 종교극에는 몇가지 중요한 변화들이 나타난다. 교회의 내부에서 벗어난 연극은 규모와 연극 상연 횟수에 있어서 점차 거대해지고, 또 부활절 중심의 연극에서 일반 축제일까지를 포함하는 확대의 양산을 보인다.
_김대현, 중세 종교극의 무대화에 관한 연구, p.225
연극무대가 교회 내부를 벗어나면서 연극은 공간뿐만 아니라 내용상으로도 확장되었다. 교회 앞 광장 주변과 한가운데에는 수많은 무대배경을 설치할 수 있었다. 연극은 더 이상 단 하나의 주제에 한정되지 않고 천지창조에서 최후의 심판에 이르기까지 구원의 역사 전체를 다루게 되었다. 하느님은 교회 정문 앞 층계참 위쪽 왕좌에 앉아 있고, 그 맞은 편에는 입체적으로 만들어진 지옥이 입을 벌리고 있다. 그곳에서는 그리스도가 최후의 심판의 날에 성서의 선조들의 영혼을 적극적으로 구원할 것이다.
신비극과 수난극은 정서적인 긴장을 불러 일으켰지만, 한편으로 구원이 실현되는 장면에서처럼 긴장이 해소되는 즐거움을 주기도 했다. 대규모 신비극은 이제 교회가 가진 권능의 표현이라기보다 시민문화의 초점이 되었다. 이 연극은 특히 알프스 지방, 프랑드르(벨기에와 프랑소에 속한 북해 연안지방), 프랑스를 비롯하여 대륙 전체로 퍼져 나갔으며 각 나라에서 독자적인 전통을 형성했다.
_안드레아 그로네마이어, 권세훈 역, 위의 책, pp.39-41
대륙에 수난극이 있었다면 영국에서는 순환극이 생겨난다. 순환극은 1350년부터 1550년까지 중세 연극이 그 절정기에 이른 식에 영국을 중심으로 상업 길드에 의해서 제작된 웨건 무대 페전트 극을 의미한다.
_노승희(동국대학교 박사수료), 중세 순환극에 나타난 연기 양식 연구, 연극교육연구, p.287
대륙의 수난극과 영국의 순환극의 가장 큰 차이점은 대륙의 것은 이동적 웨건 무대가 아니라 예배극의 맨션과 플레타 형식의 고정무대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순환극 보다 대륙의 무대는 특수효과를 살릴 수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웨건은 여섯 개의 바퀴를 부착한 형태로 두 개의 방이 수직으로 연결되어 아래쪽은 의상을 갈아입고 윗 부분은 연기가 이루어진 공간으로 되어있었다고 전한다.
_노승희, 중세순환극에 나타난 연기 양식 연구, 연극교육연구, 재인용, p.291
순환극을 상연하는데 이동식 무대와 고정식 무대라는 두 가지 전통이 발전하였다. 영국, 스페인, 그리고 네델란드에서는 신비극의 상연을 위하여 주로 이동식 무대를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 유럽에서는 주로 고정식 무대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서는 이 두가지 형태의 무대가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용되어 졌을 것이라고 한다.
고정무대의 기본형은 예배극에서 전승되었다. 고정 무대의 원래의 형태는 교회의 내부이다. 실내에서 교회의 설교단을 중심으로 회중석까지를 포함해서 맨션들이 흩어져 있고 그 맨션주변이 플라테아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예배극에서 사용되었던 것이지만 종교극이 공연장소를 교회 밖으로 선택한 이후에도 계속된다. 교회 밖으로 나온 종교극의 무대는 고정무대인 경우 마을의 광장이나 원형마당과 같은 곳에서 공연되었다. 하나의 무대에서 현세와 천국 그리고 지옥을 동시에 펼쳐놓고 현세에서의 행동에 따른 결과를 즉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천국은 반드시 왼쪽에 그리고 지옥은 오른쪽에 배치된다. 이러한 무대배치는 중세인들의 현세관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중세인들은 현재에 대해 중점을 두기보다 영원히 초점을 맞추어 종교극을 상연한 것이다.
[그림2] 발랑시엔의 야외무대 유럽대륙에서 가장 널리 쓰였던 중세의 무대 형태는 옆으로 나란히 이어진 일련의 장소로 되어있다. 가장 왼쪽이 천국, 오른쪽이 지옥이다. 둘 사이에는 다양한 성경의 장면과 장소를 나타내는 또 다른 ‘맨션’이 있다. 연기는 한 맨션에서 다음 것으로 옮겨 다니며 이루어진다.
_ Edwin Wilson, Alvin Goldfarb, 김동욱 역, ‘세계연극사’, (서울: HS MEDIA, 2008), p.161
이동무대는 수레무대(Pageant Stagem, Wagan)를 의미한다. 하나의 수레에 하나 혹은 두 개의 맨션을 싣고 그 주변을 플라테아로 설정해서 연극을 상연하는 형태가 이동무대에 의한 종교극징다. 고정무대와는 달리 각 마차에 하나 혹은 두 개의 장소가 암시되기 때문에 동시성은 사라지게 되지만, 관객은 연극의 내용을 연속적으로 보게 되므로 고정무대에서와 같은 ‘동시성’의 효과가 남게된다. 물론 이동무대의 밑바닥을 지옥으로, 이층을 표현하는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이동무대는 이층은 기계장치실로 그리고 밑바닥은 마차바퀴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_김대현, 새 천년의 기독교 문화와 연극, pp.84-85
[그림3] 순환극 마차무대 중세 종교극 무대의 한 형태로 도시나 도시의 외곽을 굴러다닐 수 있는 야외극 마차가 있다. 한 대 또는 여러 대의 마차는 무대로 제작되었으며 무대 뒤는 배우들이 의상을 갈아입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_ Edwin Wilson, Alvin Goldfarb, 김동욱 역, ‘세계연극사’, (서울: HS MEDIA, 2008), p.160
영국 콘웰 지방의 원형 야외극장(고정무대)은 흙으로 만들어졌는데, 원형의 잔디 벤치가 직경 130피트의 평지를 둘러싸고 있다. 흙으로 쌓아 올린 곳 중에서 터 놓은 두 곳은 각각 입구와 출구로 쓰였다. 페란자블로에 있는 14세기 극장에 대한 그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고 불리는 성경 순환극을 위한 무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원 중앙에는 여덟 개의 비계가 있으며, 특정 한 지역을 필요로 하는 극행동은 원을 둘러 싸고 있는 하나의 비계에서 다른 비계로 옮겨가면서 벌어질 수 있었다. 흙바닥의 좌석에 앉은 관객들은 쉽게 장면들을 따라갈 수 있었다.
_밀리 S. 베린저, 우수진 역, ‘서양 연극사 이야기’, (서울: 평민사. 2001), p.62
[그림4] 영국 콘웰 지방 원형 야외극장
3. 종교극의 쇠퇴와 그 원인
그러나 종교연극은 16세기 중엽이면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 공연을 멈추게 된다.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때를 전후하여 르네상스의 문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서 유럽 전역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또 중세사회를 강하게 다스렸던 교회의 정치적 그리고 도덕적 분열로 인한 종교개혁의 운동의 시발은 교회와 일반 대중의 분리를 초래했다.
_김대현, 중세 종교극의 무대화에 관한 연구, pp.223-224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종교극은 표면적으로 르네상스의 시작과 교회의 분열 그리고 종교개혁운동 등의 영향으로 점차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종교극의 금지 또는 쇠퇴는 다른 각도에서도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는 종교극 제작의 주체로서의 교회와 그 지도자들의 도덕적, 신앙적 타락이다. 초기의 기독교 신앙에 의한 도덕관념은 매우 수준이 높은 것이었다. 그러나 중세 중기를 지나면서 교황권이 절대권력으로 안정되자 지도층의 성적, 도덕적 타락은 곧 공공연한 것이 되었다. 이러한 도덕적 타락은 신앙의 가장 타락한 형태, 즉 외부적으로는 외식과 거짓에서 비롯되는 가장되고 강제된 경건주의, 엄숙주의를 낳았고 내부적으로 신앙 기초의 와해를 불러왔다.
두 번째는 종교극 상연의 장소가 교회 내부에서 교회 외부로 옮겨지는 것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은 세속화의 과정에서 종교극 쇠퇴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점차 제작의 주체가 길드로, 출연자는 일반 대중으로 옮겨가게 된다. 말기에 이르면 교회와 성직자는 종교극의 내용과 공연과정을 여전히 감독하고 허가하는 권한을 갖고는 있지는 큰 영향을 줄 수 없는 입장이 된다. 이러한 공연 주체의 변화의 초기의 목적, 즉 ‘선교와 교육’이라는 것에서 멀어져 ‘오락과 여흥, 그리고 이윤의 추구’라는 목적으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세 번째 원인은 위의 두 가지 원인에서 비롯된 것으로써 종교극 내용의 변질에 있다. 말기의 종교극은 ‘이방축제’와 혼합되면서 경건한 분위기와 교육적 내용보다는 떠들썩하고 성적, 종교적, 정치적 풍자와 조롱이 난무하는 음란한 행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중세말기에 영국에서는 존 노쓰브룩(John Northbrooke)은 그의 저서 <주사위 놀음과 춤, 연극 그리고 막간극에 반대하는 논문, 1577>에서 극장을 “악을 조장하고 사람들을 온전한 노동과 여타의 유덕한 수행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악마의 도구”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비난은 곧 원래의 목적에서 벗어난 종교극에 대한 금지로 나타나게 되었고 결국 1600년경에는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종교극의 그 상연이 금지 되었던 것이다.
_김대현, 새 천년의 기독교 문화와 연극, pp.87-88
4. 신비극(혹은 순환극)
신비(Mystery)라는 용어는 종교적 예배 혹은 종교적 임무를 뜻하는 ministerium에서 유래하였다 : 이것으로 신비극의 기원이 종교적임을 알 수 있다. 신비극은 천지 창조로부터 최후의 심판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성서적 사건을 극화한다.
신비적은 간단한 전례극과 구별된다: 첫째, 신비극은 종교적 의식의 한 부분으로서 공연된 것이 아니라, 한 편의 드라마로서 독립적으로 무대에 올려졌다. 둘째, 신비극은 작고 개별적인 장면의 극이 아니라, 연속되는 장면을 공연하는 작은 규모의 극이다. 따라서 많은 연극이 연속적으로 공연되어지면서, 그 공연은 ‘순환’적인 구조를 이루게 되고, 이러한 연유로 순환극이라는 용어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Edwin Wilson, Alvin Goldfarb, 김동욱 역, ‘세계연극사’, (서울: HS MEDIA, 2008), p.151
중세 순환극은 1350년부터 1550년까지의 중세 연극이 그 절정에 이른 시기에 영국을 중심으로 상업 길드에 의해서 제작된 웨건 무대의 페전트 극을 의미 한다. 순환극 등장은 10세기 초 엄숙성과 형식미를 중시하는 로마네스크 양식에 의거한 교회의 예배극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등장인물이 직접적으로 어떤 역할을 재현하기 보다는 음송을 중심으로 형식적이고 도식적인 움직이미에 의해 극의 내용을 전달하는 예배극 경향을 반영하며 발전되었다. 이후 12세기 말에 이르러 고딕양식이 대두하면서 사실적인 묘사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게 되고 예배극에서는 인물의 정서를 드러내는 연극적 재현이 이루어졌다. 예배극은 점차 교회 밖의 일반인의 공연으로 이행되었으며 순환극은 바로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종교성과 세속성이 결합된 극형태라고 하겠다.
순환극은 전통적으로 종교 축제의 하나인 코푸스 크리스티(Corpus Christi) 축제의 일환으로 천지창조부터 최후의 심판까지의 성서의 이야기들을 여러 상업 길드에서 각기 하나씩 도맡아 마을 전체를 끌고 다닐 수 있는 웨건 무대를 만들어 퍼레이드식으로 공연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코푸스 크리스티(Corpus Christi)축제는 교황 얼번 4세가 1264년에 고안하여 1311년 교황 클레멘트 5세에 의해 공식화된 종교 축제로서 시편 11편 4-5절 (그 하신 기이한 일들을 사람에게 기억하게 하셨으니, 주님은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도다. 주님은 당신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는 먹을거리를 주시고, 당신이 맺으신 언약은 영원토록 기억하시리로다)을 근간으로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 그의 구속을 감사하고 성만찬의 놀라운 능력을 기념하기 위한 축제였다. 그래서 축제는 한여름의 제전으로 이루어졌고 성만찬의 종교적 의미를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일상의 삶으로 확장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_ 노승희, 중세순환극에 나타난 연기 양식 연구, 연극교육연구, 재인용, pp.287-288
중세 신비극(Cycles)의 구조는 여러 가지 이견이 있으나, 영국의 경우 잔존하는 네 가지 cycles와 Barerley 대본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고 있듯이 뚜렷한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는 점이 공통적이다. 이는 프랑스의 경우 지역에 따라서 욥기의 일부가 포함되기도 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영국 신비극의 저자들이 그들의 신비극(Cycles) 속에 포함되고 있는 공통된 선택은 다음과 같다.
천지창조와 루시퍼의 추락/ 인간 창조와 타락/ 카인과 아벨
노아와 홍수/ 아브라함과 이삭/ 모세/ 예언자들
예수탄생: 수태고지, 요셉의 의심, 목자들, 정화, 세 동방박사들, 애굽으로의 도망, 유아학살
세례/ 유혹/ 나사로
수난: 음모, 유다, 최후의 만찬, 가이파스(Caiphas), 정죄, 십자가 처형, 마리아의 애도, 죽음
부활과 승천/ 성모 승천과 대관/ 심판일
최초의 신비극 대본의 존재 연도는 1357년으로 추정되고 길드에 의한 최초의 상연은 1442년 무렵으로 모아지고 있다. 1375년경을 기점으로 그 이전의 신비극의 발달을 가져오게 되는 주요한 두 요인이 발견되고 있다. 즉, 무수한 교회의 중심지들이 예배극들을 보유했고, 교회력에 딸라 엄격히 관련 지워지며, 예배의 일부로서 상연되던 극적 에피소드들이 존재했다는 점, 코푸스 크리스티(Corpus Christi) 축제가 공식적으로 확립된 점이다.
_김 한(동국대교수), 중세극 고찰-중세의 현대의 신비극 공연을 중심으로, 한국연극학 제 4호, pp.109-110
구조적으로 볼 때 영국 중세 신비극에 대해서는 헐겁게 구성되어져 있고, 극적 효과는 일상생활들로부터 취해진 조야한 장면들의 유입에 의해 일종의 드라마의 침입을 통해 우연히 성취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오랫동안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제롬 타일러(Jerome Taylor)의 주장대로, 이 극은 실로 교리 - 비록 위의 평가들이 주장한 교리보다는 더욱 포괄적이고 보다 덜 형식적이고 덜 특수한 성격을 띠다 - 에 뿌리박고 있는 하나의 구조적 내지 극적 통일성과 효과를 지니고 있음을 코푸스 크리스티(Corpus Christi) 축제의 공식문서들과 예배 텍스트(text)들이 제시해 주고 있다.
_김 한(동국대교수), 중세극 고찰-중세의 현대의 신비극 공연을 중심으로, 한국연극학 제 4호, pp.113-114
순환극은 보통 2년에서 10년마다 제작되었고, 어떤 것은 대단히 정교하였다. 1547년 프랑스의 발랑시엔(Valenciennes)에서 올려진 예수의 수난극은 25일 동안 계속되었다. 1539년에 프랑스의 브르주(Bourges)에서 공연된 ⌜사도신경⌟은 40일 동안 계속되었고 300명의 배우가 캐스팅되었다. 공연은 종종 새벽녘에 시작되어서, 점심을 먹기 위해 잠시 쉬고, 오후 늦게까지 계속되었다.
_Edwin Wilson, Alvin Goldfarb, 김동욱 역, 앞의 책, p.157
Ⅲ. 맺는말
야콥 부르크하르크(Jacob Burckhardt)는 말한다. “중세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중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비즈니스이지만 당시의 삶은 존재(여기있음)였다.” 우리가 중세를 이해하고, 중세의 종교극을 공부하는 것도 그런 차원과 결을 같이한다고 생각 된다.
16세기에 이르러 종교극은 그 대중적 인기를 잃어버리고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지만 그때까지 이룩한 성과는 결코 적지 않다. 오늘날 종교극에 대한 반성을 통해서 새로운 전망들을 생각해 보게 된다. 연극은 시대의 변화와 맞추어 거듭날 필요가 있다. 기독교 관련하여 예배의 한 형태로써 연극을 사용하기 원하는 사람들은 연극에 대한 기본적인 접근부터 재고해야 한다. 즉 공연과 볼거리의 강조에서 과정과 보이지 않는 가치에 대한 강조로 옮겨가야 한다. 뿐만 아니라 중세의 신비극(수난극)이 마차를 타고 거리로 나아갔듯이 거리 위의 공연으로 누구나 접할 수 있는 현대적이고 창의적인 도전적 시도가 필요하다.
다만, 중세 종교극의 몰락과정을 타산지석(他山之石) 삼아, 성경적 뿌리에 기초한 플롯에 현대적 감각을 덧입혀 노래를 조 옮김하듯 본질이 변색되지 않으면서 새로운 울림을 주기 위한 각성이 필요할 것이다. 무엇보다 종교개혁 502주년 맞는 올해, 선교역사 130주년에 이른 한국교회가 세상과 빛과 소금으로서 성경을 정체성을 바르게 확립하는 것이 시급할 것이다.
종교개혁이후로 말씀중심(Sola Scriptura)으로 돌아가는 운동을 통해, 연극문화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긴 했지만,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리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로고스가 현실로 육화(肉化)되는 가치로서 공연문화는 충분한 가치가 있으며, 그것이 바른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마부로서의 교회공동체가 성경중심의 영적가치 속에 공동체의 지원과 협력으로 길가에 삶의 존재의 이야기를 극화된 요소를 통해 언제든 새롭게 풀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