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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로 가사 본문

Church Story

광야로 가사

시애틀항해일지 2008. 7. 1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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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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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 주인공은 누구일까?

먼저, 등장인물은 누구인가? 예수님. 하늘의 목소리, 성령이 나오시고 마귀도 나온다.

그중에서 두 사건에 동일하게 등장하는 분은? 예수님 또 성령님이다.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도 성령님이 비둘기처럼 나타나시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 때에도 성령에 이끌리어 나아간다.

 

<마가복음 1: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 좀 더 강한 표현(성령의 주권적 역사)

 

성령님의 섭리와 인도 속에 있다.

 

예수님의 사역의 초기에 이렇게 성령님의 인도와 이끄심 속에 있었다.

우리의 삶의 행복한 일도 때로 어려운 일도 그분의 인도 속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이 그러하셨다면, 우리의 삶도 그러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삶의 자리는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태복음 10:29 (쉬운성경)

“참새 두 마리가 동전 한 개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가 아니고서는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질 수 없다. 심지어 너희 머리카락의 수까지도 하나님은 아신다. 그러므로 두려워 마라. 너희는 참새 여러 마리보다 훨씬 더 귀하다.”

 

그 성령님의 허락과 인도 하에서 시험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가운데 다가오는 광야의 시간도 그러한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알 때 불안해 하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의 눈을 벗어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분의 통치와 섭리아래 모든 것이 있는 것이다.

 

먼저, 성령께서 예수님과 만나는 무대는 요단강이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오시며 자기 위에 임하시고 하늘로 부터 들리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을 들으신다.

요단강에서의 예수님은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시는 축제의 자리를 경험하셨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하늘의 분명하고도 또렷한 음성이 있다.

우리는 매주 주일에 이렇게 성령의 충만함이 느껴지는 자리에 나아와야 한다.

그곳은 바로 예배의 자리이다.

 

부임한 이번 첫 주에 첫 심방은 양태영 할아버지의 병원 심방이었다.

82세의 연세에 허리를 다치셔서 수술하고 1주간 정도 입원해 계셨다. 20년전에 건축미장일을 하시다가 13년 전에 아내가 몸져 누워 아내를 수발하신 분이다. 이젠 아내도 돌아가시고, 그 연세에 홀로 사시는 분이고, 자녀들도 없으시다. 그 분이 귀가 않 좋으셔도 보청기를 하시고 계신 중에도 시편말씀을 읽어드리고 기도드리니 어린아이처럼 두 손을 모으시는 것이었다.

그 분이 보청기를 끼고서라도 가장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는 바로 주일날 예배당에서 듣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셨다.

그렇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예배당에 나와 말씀속에 임하시는 성령님과 만나야 한다.

우리는 과연 예배의 자리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를 사모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냥 의례히 시간이 되어서 앉아 있지는 않는가?

사실, 대부분 우리는 이런 자리에 있기를 원한다.

사실 예배의 자리는 이런 자리이다. 찬양의 영감이 있고, 성령의 은혜가 느껴지고, 주님의 말씀이 설교자를 통해 분명히 전달된다.

주님은 성경은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확신시켜 주신다.

하지만, 예수님은 요단강에만 머무시지 않으셨다.

여기가 좋사오니.. 하며 �자리 깔지 않으셨다.

 

성령님이 예수님께 마련하신 두 번째 무대는 광야였다.

 

태평양 연안 미국 북서부 캐스캐이드 산맥을 넘어서면 푸른 강과 나무는 사라지고 햇살아래 허허들판인 광야가 쫙 펼쳐진다. 이 길로 dry fall 나이아가라보다 더 큰 전설의 폭포가 있었으나, 지금은 물이 말라버린 빙하가 쓸고간 대 협곡이 있다.

화씨 100도 섭씨 약 40도 가량의 더위속에 뙤약볕속을 지나며 광야가 이런 곳이다 싶었다.

또한 주님은 그 이끌림에 순종하여 광야로 나가셨다.

광야는 배고픈 곳이다. 격려자가 있는 곳이 아니고 유혹자가 있는 곳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라는 아버지의 음성이 있는 곳이 아니고, 시험하는 자가 와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하며 예수님을 괴롭히는 곳이다.

 

왜 예수님은 40주 40야를 금식하셨나?

 

유진 피터슨 목사의 The Message에서는 이렇게 번역되었다. 'Jesus prepared for rhe test by fasting'

주님은 40일금식기도로 마귀의 시험을 준비하시고 대비하신 것이다.

우리도 이 예배의 자리에서 일상의 자리로 나간다.

 

예배당을 나서는 순간, 또 월요일 아침 직장으로 일터로 학교로 나가는 순간 우리는 우리에게 힘을 빼앗는 사람, 유혹하는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우리의 신앙의 본질을 흔들어 대는 자리이다. 돈 때문에 씨름해야 하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위해 염려해야 되는 자리이다.

 

주님이 40일 금식으로 시험을 준비하셨다면, 우리가 삶의 일상으로 나가 믿음으로 승리하기 위해서는 주일예배를 얼마나 잘 드려야 겠는가?

 

우리가 이런 일상으로 나가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나가는 것인가?

아니다.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나가셨다.

성령님은 우리를 온전케 하기 위해 광야로 이끌어 내신다. 광야의 사막의 경험을 통과한 사람을 귀하게 쓰신다.

모세도 40년의 광야를 보내고, 요셉도 광야같은 비천한 삶을 살고, 다윗도 사울의 창을 피해 외국으로 도망 다니며 그 고난 속에서 자신의 삶의 거품을 제거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믿음을 배운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에게 광야가 필요한가?

온전하신 주님도 test 시험 훈련을 받으러 광야로 나가셨다면, 부족한 우리들에게는 광야가 얼마나 필수적인 곳인가?

 

예수님께서 사십일 내내 금식하셔서 매우 배가 고팠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하나님이신 그 분이 삼위하나님의 한 분이신 그 분이 지독한 배고픔을 경험하신 것이다.

 

히4:15-16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알고 계십니다. 이 땅에 계실 때, 그 분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결코 죄를 짓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갑니다. 그곳에는 은혜가 있으며, 우리는 때를 따라 우리를 도우시는 자비와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고난을 배고픔을 이해할 수 있는 분이시다.

 

미국 시애틀에서 한 목사님을 만났다. 이미 초기에 당뇨로 실명을 하시고 신장 투석 하신지10년 만에 최근에 신장이식수술을 받으셨다. 목사님도 목사님이지만 10년간 병든 남편을 수발하시고 이민사회에서 안 해본 일이 없이 생활전선에서 뛰신 사모님도 대단하신분이시다. 처음 목사님을 뵈었을 때 다리가 썩어 들어가 절단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의족도 하시고 해서 휠체어를 없이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귀국한다니 집으로 초대하셔서 식사를 한번 대접하셨다.

그 목사님 가정에 사람들은 쉽게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하신다. 왜냐하면, 그 가정의 목사님 부부는 이민생활 10년에 병으로든 생활고든 많은 고생을 하셨기 때문에, 그 앞에서 자신들의 고통을 쉽게 내어 놓으실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젠 막 신장투석을 시작하게 된 어떤 분도 그 목사님 가정에 전화를 하실 수 가 있었다.

이미 10년을 그렇게 지내신 분 앞에서 자기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예수님 40일을 주야로 굶주림으로 우리의 배고픔을 친히 경험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친히 말씀으로 이 땅을 창조하신 분이신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분”이 되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인간의 고통을 친히 짊어지신 분이다.

“그가 육신으로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아뢰셨다.”고 하셨다.

그 고통의 절정이 바로 십자가이다.

예수님의 길은 바로 고통의 길이었다.

 

왜 예수님은 이 고통의 길을 가셨을까?

고통은 타락한 인간이 가진 본질적인 문제이다. 주님은 바로 이 길을 피해가신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부딪히심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체험하시고 우리의 아픔을 아신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바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나가셨다.

왜 나가셨나? 시험을 받기 위한 것이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3절을 읽어보자.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 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이 얼마나 좋은 말인가?

40일 동안 배고픈 예수님께 떡을 드시라는 것이다.

현실의 요구에 장단 맞춰 잘 살아라는 말이다. 경제의 문제, 먹는 문제, 살아가야할 삶의 요청에 예민하게 받응하고 살아라는 것이다.

시험하는자의 시험은 전혀 생뚱맞게 다가오지 않는다.

빚때문에 걱정하는 사람에게 복권한번 �어 보라는 말은 뭔가 기대를 갖게만든다.

잘되면 한번에 해결될수 있다는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해 보라는 뜻으로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는 것이다.

이 말도 솔깃하게 느껴진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 아닙니까? 그러면, 그 증거를 보여주세요.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예화>

아이들이 길가에 서 있다가 갑자기 돌진하는 버스 앞으로 달려갔다가 나온다.

용기 있음을 증명해보라는 놀이를 하고 있다.

한참 자라가는 사춘기 소년들에게 돌진하는 버스 앞으로 다가서는 것은 마치 용기인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용기가 아니라 어리석은 만용이다. 달리는 버스 앞에 갔다가 학생을 못 본 버스기사가 브레이크를 밟지 못하면, 목숨을 건 놀이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사단의 제안을 거부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인정 하나만으로 충분하셨다.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 목소리 하나로 충분하셨다.

돌로 떡을 만들어 굶주린 허기를 채우는 일에 자신의 능력을 사용치 않으셨다.

우리도 우리를 인정하시는 주님의 목소리 하나로 만족해하며 충분해 하는가?

아니면, 우리 자신을 증명할 만한 증거를 대기 위해 너무 예민해 있지 않는가?

우리가 사랑받는 자임은 우리가 무슨 사랑받을 만한 외모나 학벌이나 돈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다.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 아들을 내어주신 이가 그 아들과 함께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냐”고 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자신을 치장하는 일에 동분서주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미 이 일은 끝났다. 우리가 그 음성을 확신하면, 우리는 더 이상 사랑받는 자로서의 자신을 증명하는 일에 에너지를 소모할 필요가 없다.

 

요단강과 광야.

이 길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걸었던 길을 생각하게 한다.

홍해에서 세례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 처럼 요단강에서의 세례 받으신 예수님.

이스라엘 백성은 40년의 광야생활로 방황했고, 예수님은 40일의 광야에서의 배고픔을 통해 그 현장을 몸소 체험하셨다.

그 시험의 현장에서 주님은 신명기 8장을 인용하신다.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4 이 사십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말씀 앞에 사단은 더 이상 말문을 열지 못한다.

광야길 40년 길 장년만 60만 전체 인구로 하면 200만이상의 사람들이 살아남은 것이 떡 때문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광야를 이겨갈 수 있는 힘이 어디에 있는가?

바로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에 의지하여 사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그 입의 말씀을 사모하는가?

우리의 성경이 때 묻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때 묻는다.

 

고난의 시간에 말씀이 없이는 살 수 없다.

 

<예화- 미국독립기념일 $3.95의 잔고를 보며>

 

마태복음 10:29 (쉬운성경)

“참새 두 마리가 동전 한 개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가 아니고서는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질 수 없다. 심지어 너희 머리카락의 수까지도 하나님은 아신다. 그러므로 두려워 마라. 너희는 참새 여러 마리보다 훨씬 더 귀하다.”

 

고난의 시간에 펼쳐보는 성경, 그 말씀을 붙드는 기도에 힘이 있다.

광야의 시간에 말씀은 참 양식이 된다.

광야의 시간에 불리워 지는 찬양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다.

 

“광야가 아니고서는 드리지 못할 기도가 따로 있습니다.

광야가 아니고서는 믿을 수 없는 기적이 따로 있습니다.

광야가 아니고서는 들을 수 없는 말씀이 따로 있습니다.

광야가 아니고서는 가까이 갈 수 없는 성소가 따로 있습니다.

광야가 아니고서는 우러러 볼 수 없는 얼굴이 따로 있습니다.

광야의 인생을 체험하시 않고서는 나는 인간이 될 수 조차 없었습니다.“

 

한글개정개역

The Message

matthew 4:1-4

matthew 4:1-4

mark 1:13-13

luke 4:1-4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Next Jesus was taken into the wild by the Spirit for the Test. The Devil was ready to give it. Jesus prepared for the Test by fasting forty days and forty nights. That left him, of course, in the state of extreme hunger, which the Devil took advantage of in the first test: "since you are God's Son speak the word that will turn these stones into loaves of bread."

Jesus answered by quoting Deuteronomy : "It takes more than bread to stay alive. It takes a steady steam of words from God's mo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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