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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 누가복음 24장 / 아이들과 함께 하는 성경말씀 / 김광영목사 본문

예수 사랑하심을 성경에서 배웠네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 누가복음 24장 / 아이들과 함께 하는 성경말씀 / 김광영목사

시애틀항해일지 2022. 4. 24. 15:42

 

   오늘 본문은 13절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이야기에서 시작되어 33절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이야기로 끝이 난다. 엠마오로 오는 길의 제자의 이야기 속에는 17절에서 처럼 슬픈 빛이 있었지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32절에서 처럼 마음의 뜨거움이 있었다.

우리는 이 여정의 길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1. 왜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게 되었는가?

2. 엠마오로 오는 길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3. 왜 엠마오로 왔던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었는가?

 

1. 엠마오로 가는 길

 

오늘 본문은 '그 날'(13)로 시작이 된다. 바로 그 날은 어떤 날인가? 바로 앞 문맥에 보면, 안식 후 첫날 여자들이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고 온 그 날이다. 그러한 소식을 듣고선 두 사람의 반응은 어떤가? 예루살렘을 떠나는 것이었다.

먼저 우리는 이 두 사람이 누구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공동체에 있었던 두 명의 제자였다. 그 중에 한 명은 글로바라는 이름을 가졌다.

왜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듣고서도 예루살렘을 떠나는가?

우리는 그들의 여정 속에 나누는 이야기서 알 수 있다.

14절에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런데, 낯선 여행객이 끼어들어 '너희가 길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질문한다.

한참 길을 가던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서 머물러 섰다.

그리고 되묻는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도대체 무슨 일이냐?"

그제서야 그들이 길가에서 나눈 이야기,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19-24절을 함께 읽어보자.

그랬다.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 예수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라고 바랬는데, 그 기대를 어기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 여자들이 그의 빈 무덤을 보았다고는 하나 예수는 보지 못했다.

몇 해전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들은 소망을 보았고 활기에 찼다. 그리고 고향을 버리고서 그 분을 따라나섰다. 잘못된 세상을 바꿀 그 무언가를 발견한 것이다. 그런데 그분이 죽었다. 빛을 발하던 그 분은 고문자들의 손아래 망가졌다. 그분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 것이다.

 

 

2. 엠마오에서 생긴일

 

이 두 길손이 상실을 슬퍼하며 고향으로 가는데, 예수께서 그들 곁으로 와서 함께 걸으셨다. 하지만, 그들의 눈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다.

자신들의 대화를 묻는 이에게 약간은 짜증섞인 투로 말한다. "당신만 몰랐단 말인가?" 십자가에 달려죽은 예수님, 그리고 빈무덤이라는 어리둥절한 소식.

그런데,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난다. 그들에게 찾아온 낯선이가 진지하게 경청하다가 이제 말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25-27을 읽어보자.

모세와 선지자의 이야기, 너무도 귀에 익은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신기한 것은 그것이 마치 처음 듣는 이야기 처럼 들리고 있는 것이다.

그 낯선 이는 말한다. 그들의 슬픔이 슬퍼할 이유가 없는 것이라고 하지 않고 더 큰 기쁨의 일부라고 말한다. 두 사람이 들려준 이야기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사건이 어떤 맥락 속에 있는 큰 액자에 넣어 볼 수 있도록 긍정해 주었다.

3. 예수님을 모셔들임

"함께 머물자"는 초대만이 단순히 흥미로운 만남이 아닌 진정한 사귐으로 바꿀 수 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남은 여행 즐겁게 보내세요. 굿바이" 아니면, "부디 우리 집에 오셔서 우리가 어디서 어찌 사는지 한번 보아 주십시요"

예수님의 말씀에는 생명과 뜨거움과 도전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분을 우리 집으로 모셔 들이는가? 그 분이 우리의 가장 내밀한 삶의 벽 안에까지 들어와서 우리를 아시길 바라는가? 날이 저물 저녁에도 우리와 함께 머물기를 참으로 원하는가?

"당신을 믿습니다. 저 자신을 맡깁니다. 이제 당신이 낯선분이 아니라 저의 가장 친밀한 친구가 되어 주세요" 우리가 이렇게 말하기 쉽지 않다. 우리는 자신을 쉽게 남에게 맡기지 않는다. 나 자신도 나를 못믿는데, 어떻게 누군가를 믿고 사랑한다는 말인가?

함께 자거나, 먹는 자리야 말로 가장 상처받기 쉬운 곳이다. 침상과 식탁은 친밀의 두 장소지만, 가장 큰 고통의 장소이기도 하다. 식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지냈니?"하고 물어본다. 함께 음식을 먹고 "! 한 숟깔 더 들어보게. 이것 한번 먹어보게" 이야기가 풍겨나고 미소가 번지는 곳이다. 하지만, 또한 거리감이 가장 괴롭게 느껴지는 곳이기도하다. 오누이들이 분노와 질투를 드러내고 책망이 나오고 접시와 잔이 폭력의 도구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들은 낯선이를 함께 묵자고 초대하고 그들의 식탁으로 그 낯선이를 모셔들인다. 예수께서는 이 초대를 받아들여 길동무들의 집으로 들어가 그들과 식탁을 함께 하신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손님이지만, 그들의 집에 들어가시자마자 그들의 주인이 되시는 것이다.

 

 

4. 엠마오를 떠나는 길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셨다."

그처럼 단순한 일도 없다. 음식놓고 기도하고 같은 음식을 나눠먹는다. 이것은 집집마다 수없이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주님과 식사하는 그런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생활인 것이다. 하지만, 그속에 비밀이 숨겨있다.

그분은 "받아 먹으라, 이는 내 몸이니. 받아 마셔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니.." 우리의 예배속에 말씀의 묵상속에 항상 그 분이 주시는 사랑의 양식이 들어있다. 그분은 우리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우리의 손으로 만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오셨다. 우리와 그분 사이에 아무리 거리가 없을만큼된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셨다. 우리의 먹을것이 되고 마실 것이 되셨다. 그는 진정한 생명과 사랑을 주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십자가의 희생제물로 삼으셨다.

 

그때에, "저희눈이 맑아져 그 인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더라." 그들은 그 낯선이가 그토록 사모하고 믿었던 예수님임을 보게된 것이다. 그들과 이야기하며 식사하신 그분의 실체를 보았다. 하지만, 그순간 주님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땅을 쳐다보지 않는다.

도리어 마주보며 말한다. 32"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이제, 만사가 달라졌다. 그들에게 의심은 없다. 그분은 부활하여 살아계신 것이다. 그들은 그분의 살아계심을 알리고 싶어 주섬주섬 신발을 신고 저고리를 걸리고 지팡이를 잡아 채어 그들의 친구들에게로 가는 길을 서두른다.

이 모든 과정이 매우 적은 몇마디로 요약되었다.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