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e Like Glacier 빙하처럼 움직여라!
찬양대 헌신예배 - 여호와께서 대사를 행하셨으니 - 김광영 목사 본문
시126편
2009년 5월 24일 주일오후 찬양대 헌신예배
- 김광영 목사
(시 126:1-6)
『[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2]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3]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4]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NIV>
(시 126:1-6)
『[1] A song of ascents. When the LORD brought back the captives to Zion, we were like men who dreamed. [2] Our mouths were filled with laughter, our tongues with songs of joy. Then it was said among the nations, "The LORD has done great things for them." [3] The LORD has done great things for us, and we are filled with joy. [4] Restore our fortunes, O LORD, like streams in the Negev. [5] Those who sow in tears will reap with songs of joy. [6] He who goes out weeping, carrying seed to sow, will return with songs of joy, carrying sheaves with him.』
※ 들어가며....
우리 인생에 기억나는 가장 최고로 기뻤던 날들은 무엇인가?
시험에 합격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기다리던 자녀가 태어났을 때, 병에서 놓임 받아 건강해 졌을 때, 직장에서 승진하거나 사업이 대박을 맞았을 때...
그때 우리가 느낀 감격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 감격으로 인해 이 사건이 꿈인지 생시인지 볼을 꼬집어 보지는 않았는가?
시편의 시인은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며 과거의 기쁨을 회상한다.
시편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편 그룹이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시리즈이다.
120편~134편에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표제가 붙어있다. 이 15개의 시는 성전 뜰 여인들의 뜰에서 이스라엘자손의 뜰 자리까지 15발자국을 옮겨놓도록 되어 있는데, 그 때 한편의 시를 발자국 층계를 옮길 때마다 부르는 것이라고 한다.
삼보일배라는 말이 있지만, 그런 의미에서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는 일보일송이라고 볼 수 있다.
시편들은 시이며, 시는 교리적 논문들이나 설교가 아니다. 노래로 불러지도록 의도된 것이다. C.S. Lewis
우리 또한 그런 마음으로 시편을 노래하듯 대해야 할 것이다.
※ 본문과 씨름하며
1. 시인이 이토록 기뻐하는 이유는? (기억하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사셨음이라고 3절에서 노래한다.
우리는 시편과 관련한 3가지 사건을 떠올릴 수 있다.
1) 출애굽의 사건 (출15:1-2)
- 400년 종살이와 노예의 사슬을 벗고 자유의 몸으로 애굽을 나오던 사람들. 홍해를 마른 땅 같이 건너고 뒤쫓아 오던 애굽의 기마병들이 물속에 수장 되었을때 - 이스라엘 백성은 소고 치며 춤추며 그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2) 다윗의 왕위이다.
숱한, 시련의 칼날과 광야의 배고픔과 배척당함을 경험했던 다윗.
약속대로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의 되었을 때,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라고 노래하며, 하나님의 궤가 성전에 들어올 때 바지가 벗겨지는 줄 모르고 춤추며 찬양했다.
시 145편의 다윗의 찬송시에는 이렇게 찬송한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3) 바벨론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유다인들이다.
예루살렘은 바벨론의 공격에 잿더미로 변하고 70년의 세월을 머나먼 바벨론의 유브라데 강변에서 울어야 했다.
시 137편이 그 심경을 노래한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그렇게 바벨론 강변에서 수금을 걸어놓고 울어야 했던 그들이 고대하던 고향땅으로 돌아올 때,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그들은 여호와께서 행하신 대사로 인해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1절)
그렇다면, 이제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행하신 대사는 무엇인가?
No think No thanks 이다.
사냥꾼의 올무에서 새같이 벗어나게 하신 사건들을 기억해 보자. 우리 삶에 선명하게 새겨진 하나님의 크신 도우심을 기뻐하자.
- 일기를 기록하고, 읽어 보는 일
- 사진을 펼쳐보는 일
- 우리에게는 기억매체가 필요하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넌후 강변 어귀에 쌓아둔 강한가운데 있었던 12돌)
만일, 그때에 여호와께서 우리편에 계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가장 선명한 표적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표적이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구원하여 내사 어둠의 권세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빛의 나라로 옮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을 찬송하자.
에베소서에서는
1장에서부터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3절)도 선언한다.
인간은 과거의 높은 지위를 박탈당하고 패배하고 타락한 왕위를 빼앗긴 군주와 같다.
우리는 영적으로 맹인과 같은 존재이다. 눈은 있지만, 그 눈은 볼 수 있는 힘을 잃었다. 또 목은 있지만 소리를 낼 수 있는 힘을 잃었다.
손은 있어도 사용할 수 없는 손처럼 비참한 모습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구원을 보게하시고, 우리의 목소리로 찬송케 하시며, 우리의 손발로 주님 뜻에 합당하게 일하게 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인가? 우리가 교회에 오고, 우리발로 여기까지 와서 예배하는 것인가? 아니다. 주님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고 하신다.
우리의 찬송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대사를 묵상하는 일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은 이미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의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주셨지만,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없다면, 어찌 감사와 찬송이 있겠는가?
2. 하나님의 크신 일을 묵상한 시인은 그 기쁨을 이렇게 묘사합니다.(기뻐하라!)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다.
우리 입에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다.
우리말로 하면,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입이 찢어질 정도로 기분이 좋아서 찬송한다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란 얼마나 신나고 기쁜 일인가? 환희와 웃음을 우리는 삶 속에 얼마나 누리고 있는가?
‘만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할 것이다.’
‘밤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쉰 맘 뿐일세’
이것이 참으로 찬양하는 자의 숨길 수 없는 심정 그 마음인 것이다. 우리에게 이런 찬양이 있는가?
신앙생활을 웃음도 춤도 없는 고행 수도승의 모습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분명, 신앙은 하나님의 대사로 인해 희열과 기쁨이 그 핵심에 있다.
심지어는 장례식장에서도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찬송가를 부르는 무리가 바로 성도들이다.
세상은 이미 영결식을 치루고 울고불고 곡해도 시원찮을 마당에 곡조를 부르는 사람들. 그것은 바로 신앙인의 찬송인 것이다.
(고전 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하지만, 우리는 죽음에 매여 종노릇 하는 자가 아니라, 진리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가 되고, 천국을 소유한 자로 살게 된 것이다.
3. 찬송의 기쁨을 가진자는 기대하며 기도할 수 있다.(기도하라!)
본문에서는 아직까지도 이방에 남아서 돌아오지 못하는 동포들의 아픔을 생각하며 기도하고 있다.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리소서.
이 남방 시대들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스라엘의 지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 남방에 위치한 네게브지역은 거대한 사막이다. 네게브의 수로들은 풍우에 의한 침식작용으로, 토양이 파여 형성된 도랑들이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다. 흔히 말하는 건천 乾川, 와디 지형이다.
거의 1년 내낸 햇빛이 타들어가 굳어진 땅에 갑작스레 비가 쏟아지면 사막은 어느새 생명력으로 만발한 꽃들로 피어오른다.
갑작스런 홍수 이로 말라버린 강바닥이 차고 넘치고 바짝 타 버린 땅이 생명으로 피어나는 것이다.
기다림에 지친 오랜 불모의 땅의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의 급습으로 살아나듯, 우리의 포로를 돌려주시도록 간구한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라고 기대한다.
농부는 황무지에 씨를 뿌린 모진 수고 뒤에 찾아오는 결실의 때를 안다. 씨 뿌리는 고된 일에 수확의 기쁨이 뒤 따라 오는 것이다.
※ 삶에 적용하며
과거, 미래 어느 쪽이든 많은 시련이 존재한다.
우리가 현재에 찬송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과거의 죄책감, 미래에 대한 염려가 현재의 기쁨 압사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현재에 기뻐할 것을 요청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닦아내는 법을 아시고, 부활의 역사 가운데 새 생명의 웃음을 탄생시키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 기쁨을 하나님이 주셔서 누리는 것이지 우리가 일궈내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것을 누리고 있느냐 아니냐이다.
우리의 삶에 주신 기쁨을 깊이 묵상해보는, 찬양대원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노래하며 찬송하자.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 찌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올 것이다.
이미 주신 은혜와 지금 누리고 있는 은혜를 보지 못하고, 남들과 비교하며 자신이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에 사로잡혀 불평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가 이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자가 되어야 하는가?
1) 가난한 마음을 가지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하셨다. 욕심을 품지 말고 낮은 마음을 가지자.
(딤전 6: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아무것도 가져갈 것이 없다. 먹을것과 입을 것이 있음에 족할 줄 알자.
2) 낮은 자를 섬기자
우리 주위의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며, 또 내 삶에 주신 그 기쁨을 발견하자.
1%사마리아인 봉사자, 사랑의 쌀 전달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알게 된다.
우리가 나누어 줄때, 우리에게 이미 엄청난 많은 것들이 있음을 그 때에야 깨닫고 진실한 감사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3) 좋은 일이 있어서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며 찬송하자.
최용덕씨 곡에 <하나님은 실수 하지 않으신다네>
“내가 걷는 이 길이 혹 굽어 도는 수가 있어도 내 심장이 울렁이고 가슴 아파도 내 마음속으로 여전히 기뻐하는 까닭은 하나님은 실수 하지 않으심일세
내가 세운 계획이 혹 빗나갈지 모르며 나의 희망 덧없이 쓰러질 수 있지만 나 여전히 인도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까닭은 주께서 내가 가야할 길을 잘 아심일세“
그렇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기에 우리는 역경 중에도 찬송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하박국의 찬송은 찬송의 백미라 할 수 있다.
(합 3:16-19)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우리가 찬송할 이유를 바울사도도 증거한다.
(고후 4:8-9)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는 자가 되기때문이다.
우리는 ‘에벤에셀의 하나님’ 지금여기 까지 우리를 도우셨던 하나님을 기억하고 묵상하자. 그리고 지금이 비록 힘들도 어렵다 할지라도 찬송드리자.
에벤에셀의 하나님은 곧 ‘여호와이레’ 미래를 위해 준비하시고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Church 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의 쌀 나눔 부산중앙교회 [새수영신문] (0) | 2009.07.17 |
---|---|
마태복음 25:14-23 달란트비유 (0) | 2009.06.10 |
부산중앙교회 - 섬김으로 기쁨이 가득한 교회 (0) | 2009.05.09 |
내려오는 은혜 올라가는 찬송 (0) | 2009.04.03 |
광안동시절 한성교회 추억의 사진 (0) | 2009.0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