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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 - 김광영 목사

시애틀항해일지 2009. 7. 31. 07:32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세상은 어떠한가?

재촉하고, 강요하고, 요구하는 세상이다.

 

우리안팎의 목소리들은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힌다.

고도로 자극적인 세상 한 복판에서 조용히 기도하기는 너무나 힘들다.

 

기도 없는 세상은 우리를 협박하는 세상이다.

매일 아침 깰 때마다, 소란스럽고 복잡한 세상을 만난다.

 

그러한 세상에서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의 언어는 고통에 짓눌릴 때, 탄생한다. 우리가 태어나서 처음 내는 소리는 바로 울음소리이다. 우리의 초기 언어는 모두 알아듣기 힘든 말이지만, 먹을 것과 온기와 보살핌과 사랑 등 생존에 필요한 것을 얻게 해 준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언어와 동일한 조건에서 나온다. 재앙의 벼랑 끝에서 쓰러질 듯 흔들릴 때, 우리는 구원의 외침으로 기도의 언어가 튀어 나오는 것은 느끼게 된다.

 

이런 기도의 언어는 우리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만든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감으로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의 발자취 속에서 하나님과의 긴밀한 연결고리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사실, 빈 공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유용성과 효율성 통제력에 너무 익숙해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통제되지 않고, 시간낭비같이 느껴지는 순간에 대해 겁에 질리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 있는 그대로 나가는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자신을 새롭게 발견해야 한다.

 

우리 자신이라는 존재는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직업과 그 사람이 하는 일을 통해 사람의 존재를 파악하고 평가 할 때가 많다. 하지만, 그 사람이 하는 일 = 그 사람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일에 성공할 때도 있지만, 실패할 때도 있지 아니한가? 별로 할 일이 없다면 나라는 존재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또 쉽게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의해 자신을 평가할 때가 많다. 누군가가 칭찬해주면 우쭐해지고, 내 삶이 의미 있어 보이다가도, 또 누군가의 악평이 있다면 자신이 하챦게 여겨지고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는 흔히 내가 가진 것으로 자신을 평가할 때가 많다. 나의 부모의 배경, 교육의 배경, 가진 재물과 혹은 자신의 가진 건강. 하지만, 그것을 잃게 된다면 또한 어떻게 될 것인가?

 

세상은 우리에게 말한다. 당신은 어떤 직업을 가졌느냐? 그 일을 통해 사람들의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느냐? 또, 당신이 소유한 것이 얼마나 되느냐?

하지만, 우리는 우리자신이 하는 일도 아니며, 사람들의 시선에 비춰진 우리 자신도 아니며, 내가 가진 것에 의해 평가되는 존재도 아니다.

 

영적인 삶에 가장 큰 적은, 성공이나 인기 혹은 권세가 아니다. 그 보다 더 무서운 적은 바로 '자기거부'이다. 자신이 무익하고 사랑받지 못할 존재라는 소리를 믿게 되면, 그러한 마음에서 세상의 성공과 인기와 권세가 매력적인 해답으로 다가오게 되며, 더욱 그것에 목매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으로 기도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쉬지 않고 하나님 앞에 독백을 쏟아 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살아야 한다.

 

우리는 질문한다.

 

이렇게 요구가 많고, 속박이 많은 세상에서 어떻게 끊임없이 기도할 수 있습니까?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해야 하겠는가?

우리자신의 필요로 요청으로 부르짖는 것에서 우리속의 끊임없는 상념과 생각들을 하나님과의 대화로 전환시켜야 한다. 묵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우리는 복음서나 시편의 구절에 집중해야 한다.

오랫동안 촛불하나만 응시하듯이, 우리는 그 말씀을 응시하며, 내게 꼭 필요한 한가지 임을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아무에게나 기도하지 않는다.

그 기도의 대상은 분명하다.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 하나님께 기도하기 원하는 나는 누구인지를 하나님께 기도하며 보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상 하나님이 우리를 찾고 계시다.

선한목자가 길 잃은 양을 찾아 헤매고, 동전을 잃어 버린 여인이 그 동전을 애써 찾고 있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를 찾고 계시다.

우리는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찾을 것인가?" ->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찾도록 해 드릴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시도록 골방에 가서 앉아 있어야 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시간을 가져야 한다.

 

시 95:7-9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고 사랑의 음성을 들으라."

 

우리는 나의 상황 속에서 나에게 주실 독특한 말씀이 분명 하나님께 있다는 깊은 확신을 품고 경건하게 차근차근 말씀을 읽어 가야 한다.

하나의 정보를 얻는 책으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심령을 향해 말씀하시고, 빚어주시는 책으로 머리로서만 아니라 가슴으로 읽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음성을 들려주길 원하신다.

이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이다.

우리는 그 말씀을 읽고, 읽으면서 듣고, 들으면서 묵상해야 한다.

 

우리는 눈을 통해서 보다는 귀를 통해서 세상을 더 많이 인식한다. 청각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 어머니 뱃속에서 부터 생긴 최초의 감각이자, 세상을 떠날 때 까지 남아있는 마지막 감각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의 귀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소리 내어 읽어야 한다.

묵상하다는 단어는 히브리어 '하가'에서 왔는데, 그 뜻은 "어떤 것을 반쯤 소리 내어 중얼거린다."이다.

작은 소리로 읊조리는 것.

 

시 63:6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 하오리니"

 

시 119: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이렇게 말씀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이 중요하다.

소리 내어 읽으려면, 먼저 눈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입이 열려야 하고, 귀가 들어야 하며 마음과 생각이 듣게 된다. 소리 내어 1번 읽을 때, 눈과 입과 귀와 머리가 다 활동하는 것이다.

 

묵상이란, 바로 몸의 행동이다. 우리는 묵상할때 말씀을 입으로 중얼거리고 소리를 내며 후두와 혀와 입술로 음절을 발음하며 그 의미를 느낀다.

묵상은 읽고 의미를 찾아내는 하나의 지적이 과정 그 이상이다. 소리내어 읽으면서 말씀을 듣고 또 들어 그 소리들이 근육과 뼈속 깊은 곳까지 파고 들게 하는 생리적인 과정이다. 묵상은 씹는 행위인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야 한다.

사람이 술을 먹고, 술이 술을 먹고, 술이 사람을 먹는다고 했던가?

우리가 성경을 읽지만, 성령이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고, 성경에 의해 우리자신이 읽혀져야 한다.

 

말씀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교만과 죄악을 밝히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되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그 말씀 앞에서 읽혀져야 한다.

본문은 말하고 있다.

 

이 단락의 골자는 '어찌'(How)인데, 이것이 두 번 등장한다.

97절에서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이고,

103절에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이다.

 

그리고, 104절은 그 모든 것을 결론짓는다.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그 말씀과 시인의 관계는 어떠한가?

98절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99절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100절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시인은 그 계명들과 함께 있고, 말씀을 읊조리고, 지키며, 101절에 보니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얼마나 함께하고 있는가?

 

제자훈련생들은, 과제를 하기 위해서라도 억지로 성경을 입으로 외우고, 또 연구하고 큐티하며 노력을 한다. 일주일에 설교 한번 듣는 수동적인 자리에 있다가 말씀을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으로 끌어들여서 함께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많은 훈련생들이 그렇게 힘들지만, 말씀과 함께 함으로 자신의 삶이 변화되었다고 고백한다. 제자훈련 교재가 그를 바꾸었겠는가? 교사가 탁월하게 인도해서 신앙이 바뀌었겠는가? 어떤 교재든 어떤 교사든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생명의 말씀이 생명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오늘 말씀은 말한다. 이렇게 말씀과 함께 하고 읊조리는 자들 그리고 법도를 지키는 자들에게는 변화가 있다.

 

98절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며/ 99절 나의 명철함(멍청함이 아니다.)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 100절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낫다고 한다.

원수보다도 스승보다도 노인보다도 명철하고 지혜롭게 하는 것이 말씀이다.

 

원수는 무엇인가? 우리를 괴롭히는 누구 일 수 있다. 아니 좀 더 포괄적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여러 문제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문제들 원수들을 넘어서게 하는 지혜가 이 말씀에 있다.

 

스승은 무엇인가? 학식과 배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은 그 어느 대학을 나오고 유학을 다녀오고 가방끈이 제 아무리 길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읊조리는 자 앞에서는 그 스승도 명철한자가 아니라 멍청한 자가 되는 것이다.

 

노인은 무엇인가? 노인은 많은 경험을 가진 자이다. 세상의 산전수전공중수중전을 다 겪은 사람이라 삶의 지혜와 명철이 뛰어나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자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103절의 시인은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고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찾고 계시다. 그 말씀 속으로 들어가 응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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