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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고문시대? 그 돌파구는? 본문
2차대전때 지옥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 박사
한 작곡가가 희망찬 얼굴로 말했다.
"한 달 후면 모든 게 끝날 거야.
꿈을 꿨는데 다음달 3월 30일에 독일군이 항복했거든."
3월 30일이 되었지만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시름시름 앓던 작곡가는 바로 다음 날인
1945년 3월 31일에 숨을 거두었다.
나는 깊이 깨달았다.
희망의 끈을 놓아버린 사람은
자신의 목숨마저도
쉽게 포기하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자살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고통 속에서 죽음을 택하는 것은
가장 쉽고도 가장 나태한 방법이니까.
1945년 4월 빅터 프랭클은 유태인 수용소에서 해방되었다.
그가 남긴 말이 있다.
"육체적 자유는 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 나의 의지는 분명
내 것 이었다."
"사람은 어떠한 최악의 조건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 빅터 프랭클 -
포로수용소라는 절망의 공간에서 살아남지 못한 자가 오히려 희망을 많이 이야기하는 낙관주의자라는 사실은 단순히 희망을 많이 말한다고 해서 절망에서 헤어 나올 수는 없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아까 작곡가처럼 희망에 대한 확신이 그를 오히려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믿노라
- ‘희망고문시대’에 ‘신앙’으로 돌파하기
19세기 프랑스 환상문학의 거장 ‘빌리에 드 릴라당’은 1883년 단편소설에서 ‘희망고문’(The Torture of Hope) 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소설의 주인공 유대인 랍비는 고리대금업을 했다는 죄목으로 종교재판소 감옥에 갇혔다. 감옥에서 나올 가능성이 없이 고통을 당하고 있던 어느날 저녁 감옥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출구를 발견했다.
고통의 세월가운데 출구를 보고 탈출 가능성을 엿본 랍비는 얼굴에 생기가 돌고 온 몸이 삶의 의욕으로 충만해졌다. 그는 상상하기 시작한다. 밤새 도망을 쳐서 산 속에 숨어들수만 있다면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순간, 자신의 팔에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림자는 서서히 다가와서 이윽고 그를 삼켜 보리고 만다. 환각이 아니다. 마침내 누군가가 자신을 껴안았음을 깨달았다. 그를 단단히 움켜쥔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종교재판소장이었다. 랍비는 눈일이 튀어나올 것같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종교재판소장에게 안겨있는 것이다. 이 운명의 저녁은 미리 준비된 고문이었다. 바로 희망이라는 이름의 고문이다.
프랑스 작가가 <희망고문> 소설에서 말하고자 한 것이 무엇일까? “희망을 살짝 보여주었다가 그걸 움켜쥐려는 찰나 다시 빼앗아 버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잔인한 고문이라는 것이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작가인 ‘장 아메리’는 열정적인 레지스탕스 활동과 그로 인한 투옥, 고문, 그리고 홀로코스트를 견뎌낸 생존자로서 스스로 ‘자유죽음’으로 생을 마감했다. 심지어 자살한 호텔방의 숙박료와 폐를 끼쳐 미안하다는 메모까지 남겨놓았다고 한다.
이 ‘장 아메리’는 ‘인생은 살 만하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단언하다. 거짓인 줄 뻔히 알면서도 살아야 한다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희망을 품게 만드는 것이 참으로 헛되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희망고문’이라고 한다. 진실에 기반 하지 않은 말로 희망을 강요하는 것은 가혹한 고문 일뿐이다. 희망할 수 없는데 희망하라고 윽박지르는 것이야 말로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88만원>세대의 저자인 우석훈 씨는 이 소설을 언급하며 오늘 20대에게는 너무 많은 희망이 오히려 ‘고문’이라고 쏘아 붙인다.
IMF이후 한국사회는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겪었다. 안정적 일자리 수는 급격히 줄고, 비정규직은 기록적으로 증가하고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경쟁사회에 돌입해 있다.
그런데 서점에서 방송에서는 “성공한 20대의 이야기”를 비롯해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희망의 ‘과잉상태’이다. 젊은 세대가 희망을 실현시킬 기회가 턱없이 줄어든 마당에, 그들에게 희망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그저 ‘희망고문’일 뿐이다. 책과 방송에서 희망을 ‘판매’할뿐 20대의 성공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절망스러운 20대에게 또다시 고문을 가하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자리도 많이 창출하고 20대의 성공신화를 언론은 자주 말하는데 본인이 정작 취직할 곳은 없다는 상황이 젊은이를 더욱 좌절하게 만드는 것이다.
병원도 많고 약국도 많은데 본인의 병을 바르게 진단하고 처방해줄 약이 없다는 사실은 환자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경기도 풀리고 경제상황도 좋은 전망이라는데 본인의 직장과 사업처는 불황이라는 것은 더욱 자괴감만 심어줄 뿐이다.
릴케는 자신의 시가 굶주린 소녀에게 빵 한조각이 되지 못하는 것에 탄식했다. 카뮈는 자신의 실존주의가 몽마르트 비탈길에서 얼어 죽는 노숙자에게 담요 한 장만 못하다고 탄식했다.
그렇다면, 성경의 말씀은 무엇인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하신 그 말씀은 무엇을 말하는가?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성경은 우리에게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낙관주의적 심리요법을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오히려 ‘신앙’을 말해준다. 절망의 반대말은 ‘희망’이 아니라 ‘신앙’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을 말했던 철학자 키엘케골은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 ‘절망’을 이야기 했다. 이 절망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저 ‘잘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는 안 되는 것이다. ‘절망을 벗어나려면 믿음’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보았다.
(고후 1:8-10)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바울사도는 살 소망 살 희망이 끊어져도 우리가 마지막 붙들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다. 자신에 대해서는 철저히 절망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분으로 온전히 신뢰하고 신앙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오늘본문에서 바울을 로마로 압송하기 위해 출항한 배의 이야기가 나온다.
항해 중 해상 조건은 첫 출발부터 힘겨웠는데, ‘역풍을 맞았기에’ ‘더디 항해하였고’ 마침내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났다’는 내용이 그것을 보여준다.
13절을 보면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하지만, 14절에서는 ‘얼마 안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이런 상황에서 선원들은 선체를 밧줄로 동여매고, 닻을 내리며, 화물을 바다에 내던지고, 나중에는 배의 장비마저 내던져 버린다. 하지만, 오늘 20절의 말씀처럼 이 모든 조치들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 졌더라.’고 기록한다.
그때에야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한다.
‘그들이 자신의 말을 듣고 그레데를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했으면 좋을 뻔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22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니라.’ 이것은 그냥 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23-26절이 그 내용이다. 바울에게 어젯밤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이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하기에 여러분도 안심하라고 그 말씀을 신앙하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가질 신앙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근거한 것이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믿는 신앙이다.
(롬 8:37-39)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여러분 삶에도 유라굴로 광풍을 만난 배의 선원들처럼 절망의 순간을 지나고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보다 나아질 기미는 없고, 갈수록 어둔 터널만 깊어지는 것 처럼 느껴지는가? 과연 그런가? 그렇게 미래를 예측하고 판단하는 것이 옳은가?
통계청이 2008년 9월에 내놓은 2007년 사망원인통계결과에 따르면 한 해동안 사망한 사람들 중 자살에 의해 죽음에 이른 사람이 1만 2,174명 이는 하루 평균 33명이었다. 인구 10만명당 24.8명이라는 경이로운 자살률이다. 30개 OECD국가중 가장 높은 수치로 2위 헝가리가 2002년 보여준 23.2명보다도 훨씬 높은 것이다.
2007년에 사망의 원인으로 1위가 암, 2위가 뇌혈관 질환, 3위가 심장질환이었는데 그 다음이 바로 자살이었다. 이것은 성인병 질환으로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당뇨병보다도 높은 수치이고 간질환이나 차량사고, 고혈압이나 폐렴보다 높은 것이다.
이렇게 우리 한국사회가 많은 경쟁과 또 스트레스 그로인한 절망과 절망에 대한 선택으로 자살의 끝에 몰려있는 개인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불교를 하나의 철학으로 볼 때, 참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이 세상을 보는 파편적인 진리는 보여주고 있다. 불교의 철학은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을 보여주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독화살의 비유이다.
[그것은 마치 몸에 독화살을 맞았던 사나이의 경우와 같다. 그는 그로 말미암아 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는데 친족들이 그를 가엾이 여겨 의사를 청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하면서 치료받기를 거절하였다. '아직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 나는 그에 앞서 화살을 쏜 사람에 대해 알아야겠다.
또 그는 말하기를 '아직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된다. 나는 그에 앞서 그 활에 대해 알아야겠다. 그 활은 산뽕나무로 만든 것인가, 뽕나무로 만든 것인가, 물푸레나무로 만든 것인가, 혹은 뿔로 만든 것인가를 알아야 하겠다.'고 하였다. 또 '그 활줄은 소 힘줄로 만들었는가, 노루나 사슴 힘줄로 만들었는가, 혹은 실로 만들었는가를 알아야하겠다'고 하며 치료받기를 거절하였다.]
독화살 맞은 사람에게 이 독화살을 내가 왜 맞아야 하는지, 누가 쐈는지, 어디서 쫬는지, 활줄이 뭘로 만들어 졌는지 묻는 것은 우문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빨리 의사의 말을 듣고 화살을 뽑고 독을 치료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불교는 이렇게 독화살을 맞은 사람. 고통하는 인간을 보았다. 바로 ‘인생고해’라는 것이다. 인생은 고통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의 원인은 ‘고집멸도’ 즉 집착에서 나오기에 집착을 버려 금욕함으로 해탈의 경지 구원에 이른다고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념무상의 평정심은 ‘내가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그 생각조차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불교의 원래종파인 소승불교에서는 외부의 초월적 전능자를 인정하지 않는 철저한 무신론에서 시작한다. 도울 자가 없으니 스스로 고통에서 해쳐 나와야 하는 것이고 그것의 방법론으로 8정도라는 수행법을 통해 금욕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스스로 고통에서 구원받고 완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는가? 그럴 수 있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지고 우리를 위해 죽으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 사람은 사망에 매여 종노릇하고, 벗어나고자 하면 할수록 더욱 목 죄어드는 올가미처럼 세상에서의 자기선행과 절제는 도리어 지키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고통만 더할 뿐이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해 주는 것이다. 이전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가 말씀하신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고통의 받는 자리에 서신 것이 바로 복음이다.
그 고통을 성경은 말한다.
(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히 4:14-16)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는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예수님. 그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기도로 나갈 수 있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나갈 하나님의 보좌에 호소할 수 있는 길을 얻게 된 것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나아갈 길이 없다고 하신 말씀대로 그 중보자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우리의 고통을 호소하고 구원받을 길이 있는 자들이다.
우리가 고난당할 때 고통가운데 있을 때,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다.
고난에 관한 진실 중 하나는 모든 인간이 예외 없이 고난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곳은 낙원이 아니다. 아담이후 타락한 실낙원의 세상이다. 에덴에서 추방당한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우리는 죄로 인해 고통하고 아파하는 곳에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해야 한다. 모든 고난은 또한 반드시 지나간다는 점이다.
성경은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 겪는 것으로 족하다.”(마 6:23)
어떤 현명한 왕은 자신의 반지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새겨넣어 아침저녁 묵상하고, 훌륭한 통치자가 되었다고 한다.
This, too, shall pass away (이 또한 지나가리라)
좋은 일이 닥칠 때 희희낙락하며 기고만장할 것도 없다. 잠시 후 지나간다. 궂은 일이 밀려와도 마찬가지다. 어느새 지나간다. 고통 또한 잠시 머물다 지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고통은 재수없이 걸려들러가 사주팔자가 안좋아서 당하는 숙명적인 그 무엇이 아니다.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이 들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성경에서 하루아침에 재산과 자녀와 자신의 건강마저 잃었던 욥의 사건이 나온다. 그러한 환난조차도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나는 일은없다.
욥은 그 고난의 자리를 지나면서 이렇게 표현한다.
(욥 23:8-12)
『[8]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11]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12]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내가 그분을 뵐수는 없으나 그분은 내 길을 알고 계시고, 나를 단련하사 순금같게 하신다는 것이다.
+ 목수의 공구함 안에 있는 끌처럼
실패는 우리 속에 아름다운 것을 만들려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입니다.
그 날카로운 날로 튀어나오거나
불필요한 부분을 파내서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으로
우리를 만들어 가십니다. +
우리의 고난은 하나님의 손에서 단련되고, 순전한 신앙, 순도 높은 믿음으로 만들어 가시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유라굴로의 광풍을 만나 여러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어 구원의 희망이 없어질 때에라도, 우리곁에 서셔서 ‘두려워말라 너와 함께 있겠다’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우리는 ‘희망고문’의 시대에 참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고난의 시간을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신 적이 없는데, 십자가에까지 그 아들을 주시고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신 그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으로 붙잡고 믿음의 노를 힘차게 저어가자. 하나님이 부르짖는 자녀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반드시 살길을 허락하신다.
천로역정의 작가 존번연
‘당신의 손안에 하나님이 없다고 느껴질 때, 당신이 하나님의 품안에 있음을 믿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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