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e Like Glacier 빙하처럼 움직여라!

쓰심에 합당한 그릇 - 김광영 목사 본문

로고스의 창

쓰심에 합당한 그릇 - 김광영 목사

시애틀항해일지 2011. 6. 10. 14:37

 

 

 

 

 

어제 우리교회 한 성도님의 도자기 공예전을 다녀왔다. 각기 다른 모습에 다양한 창작품들로 흙이 예술가의 손에 들어갔을 때 전혀 새로운 창작품들로 탄생되는 것을 보았다. 그야말로 작가의 혼이 담겨진 그릇 그릇 마다 모두 독특한 개성이 있고 담겨진 의미가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길거리의 수많은 상품 중의 하나로 만들지 않으셨다. 마치 갤러리에 있는 작품들처럼 각각 고유하게 만드셨다. 상품은 값을 매길 수 있지만 작품은 값을 매길 수 없다. 유일하게 하나뿐인 각각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쓰심에 합당한 그릇

딤후2:20-26

 

 

 

SUN 29th May 2011

 

▶ kerigma

1. 깨끗한 그릇

(1) 큰 집의 여러 그릇

오늘 성경본문에 보니, 큰 집에는 그릇이 있다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 중에는 금으로 된 것도 있고, 은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다. 반면에 나무를 깎아 만들거나, 흙을 구워낸 질그릇도 있다.

큰 집은 하나님이 주인 되어 관리하시는 이 세상이기도 하고, 친히 머리되어 다스리시는 교회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통치 속에 살고 있다.

집마다 지은 이가 있듯 이 세상을 만드시고 다스리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이 바로? 맞다!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세상의 주인이 누구신지를 잊고 사는 것 같다.

 

그 큰 집에 다양한 재질로 만들어진 그릇이 있는 것이다.

못생긴 그릇, 잘생긴 그릇, 큰 그릇 작은 그릇, 주근 깨난 그릇, 여드름 난 그릇, 금처럼 비까번쩍하는 그릇도 있고, 나무처럼 투박하게 보이는 그릇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모두가 그릇이라는 것이다. 그릇끼리는 ‘내가 잘 났니 니가 잘 났니’ 티격태격 싸울 수 있지만, 주인 앞에서는 똑같은 그릇일 뿐이다. ‘도토리 키재기’이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피조물일 뿐이다.

우리가 주인행세를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어쨌던 이 그릇들은 귀하게 쓰이기도 하고, 천하게 쓰이기도 한다. 불필요한 그릇은 아무것도 없다. 밥그릇도 있어야 하고 간장종지도 있어야 한다.

롬 9:21-22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를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이 없겠느냐?’고 묻는다. 우리 삶에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신본주의 신앙이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다른 비유로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에게 한 몸의 각지체로서의 성도들의 모습이 표현된다.

 

(고전 12:14-21)

『[14]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주님은 당신의 필요대로 각각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그 몸의 지체로 주셨다.

(2) 귀히 쓰는 그릇

자, 그럼 주인은 과연 어떤 그릇을 사용하겠는가?

우리는 당연히 질그릇보다 금그릇을 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귀히 쓰이는 그릇은 깨끗한 그릇이다. 아무리 금으로 반짝거려도 곰팡이 핀 그릇에 밥 퍼려고 하겠는가?

 

‘그릇’이라는 말은 고대문헌에서 비유적으로 사람들을 의미한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말처럼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공예가들도 좋은 그릇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초벌구이에 유약을 바르고 재벌구이를 하고 높은 열에 담금질하며 많은 시간과 관심과 공을 들인다. 그렇게 그릇하나가 이루어지는데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 주님은 어떤 그릇이든지 ‘깨끗한 그릇’을 쓰기를 원하신다. 금 그릇이라도 깨끗하지 못하면, 주인이 쓰지 않고 질그릇이라도 깨끗하면 귀한 그릇으로 주인이 사용하신다.

누구든지, 어떠한 사람이든 어떤 외모에 성격에 가정환경에 상관없이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된다. 사람은 외모를 취하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다.

깨끗해 해야 할 이런 것이란 무엇인가? 16절의 망령되고 헛된 말과 18절의 진리에 관하여 그릇된 것 19절의 불의한 것

‘이런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해야 한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 깨끗한 그릇에 보화를 담길 원하신다. 우리는 금그릇에 보화를 담길 원한다. 하지만 보화는 깨끗한 그릇에만 담아주신다. 우리는 어떤 그릇인가? 우리는 자신의 그릇이 좀 더 화려하고 빛나게 만드느라 많은 경력도 쌓고 이력서에 적을 자격증도 따고 사회적 명성도 쌓아 튀어 보려고 하지만, 진정 우리의 속에 가득 찬 욕심과 탐심의 죄는 씻어내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는 아닌가?

컵의 ‘외모’에 광칠하느라, ‘속’은 보지 못하는 우리는 아닌가?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고 계신다. 오늘 교회에 선거가 있었지만, 우리가 정말 생각해야 될 것은 ‘이번’선거에 붙고 안 붙고‘가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느냐 하지 않느냐’이다.

주님 쓰심에 합당한 자는 자신의 그릇을 깨끗이 하는 자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함을 받고 말씀 앞에 정결하게 사는 자 죄를 피하고 의를 좇는 자는 거룩한 자이며, 주인의 쓰심에 합당한 자이다.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된다.

깨끗한 그릇은 당장 귀하게 쓰임을 받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중히 쓰임을 받게 된다. 깨끗한 그릇에 더러운 물건을 담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하물며 하나님께 자기를 정결케하고 기다리는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하나님께로부터 귀히 쓰임을 받게된다.

 

비록 요셉처럼,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이라도 정결한 양심을 가졌다면, 단번에 애굽의 총리로 세워 온 나라를 통치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아무리 사울 왕처럼 왕이라 해도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고 자기 이름을 위한 기념비만 세우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이 전쟁 속에 죽게 하시는 것이다.

성경의 또 다른 인물로 모세를 생각하게 된다.

그가 혈기왕성한 40년의 애굽의 왕자시절에는 하나님이 그를 사용하지 않으셨다. 80세가 되어 미디안 광야에서 양똥 냄새에 찌들어 있는 그때, 주님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를 부르신다. 자신감찬 모세를 하나님은 아직... 이라 말하셨지만,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의지할 수 밖에 없는 80세 모세를 이제... 가서 바로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고 외치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충분한시간이 필요하다.

문제는 우리의 관점과 주님의 관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의 시기와 주님의 시기기 다르다는 것이다. 다르다면 누가 더 정확히 보시고 바르게 일하시겠는가?

(사 55: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우리의 그릇이 비록 질그릇처럼 보잘 것 없다하여도 말씀가운데 깨끗해 질 때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배를 우리에게 담아 주신다.

 

▶ one point

바울은 디모데에게 금그릇이 되라고 하지 않았다. 귀히쓰임받는 그릇, 주인의 쓰심에 합당한 그릇이 되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정결을 요구했다.

하나님께 한 사람이 기도한다. 하나님 아름다운 나비를 나에게 주십시오. 하지만, 하나님은 무서운 벌레떼를 보내셨다.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셨기에 버리지 않고 받았다. 다시 기도드린다. 하나님 아름다운 꽃을 주십시오. 이번에는 꽃이 아닌 삐쭉거리는 가시가 있는 선인장을 주셨다.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기도의응답으로 받고 기다렸다.

시간이 흘렀다. 그 벌레들이 고치를 만들고 허물을 벗더니 아름다운 나비떼가 되었다. 그 날카로운 가시가 있는 선인장 위에서 생각지도 못한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감사함으로 받고 순종하는자에게 하나님은 최선의 것을 반드시 주신다.

 

시23편에 양과 목자의 비유가 나온다.

양은 종종 목마름을 빨리 해갈하고 싶어 눈 앞의 오염되고 둔탁한 물이라도 마셔서 목을 축이길 원한다. 하지만, 우리 목자되신 주님은 어떤 분인가? 푸른 초장 맑은 물가로 인도하는 분이다. 잠시의 시간이 지나면 그분은 맑은 물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역사하신다.

 

우리는 ‘주님말씀하시면’ 이 찬양의 가사를 묵상해보자.

주님 말씀하시면 내게 부담스럽고 힘들어도 주님이 나를 향해 최선을 주심을 믿고 순종으로 나가야 한다. 주님 뜻이 아니면 아무리 내 열정이 불타도 멈춰서야 한다.

 

총신신대원 졸업식때 한 목사님의 설교가 기억난다.

‘호랑이를 잡으려 하면 호랑이는 도망갑니다.

숲이 우거지면 호랑이는 스스로 찾아 옵니다.‘

목회의 현실에 쫓겨 살지 말고 영적으로 자질로 자신을 잘 준비하고 진득이 기다리면 반드시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말이었다.

그 총신 졸업식을 하던 그 해 강도사 고시를 쳤다. 제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떨어졌습니다.

동기들 절반은 ‘강도사’가 되었는데, 여전히 저는 ‘전도사’로 남았습니다.

그때 복잡한 심경속에서 읽었던 책 한 권이 있었는데, 워싱턴 카버 땅콩박사의 이야기였다. 미국의 백인이든 흑인이든 인종에 관계없이 좋아했던 흑인 박사 카버, 그는 최초로 미국에서 흑인으로 대학을 공부했던 사람이었다. 그 인생을 요약하는 한마디가 있다.

‘나를 올라온 높이로 재지 말고 헤쳐 나온 깊이로 재어 주시오.’

우리 또한, 주님 쓰시기에 합당한, 내공이 잘 다져져서 주님이 기꺼이 기쁘게 쓸 수 있는 그릇으로 우리 삶을 드리기를 바란다.

'로고스의 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손  (0) 2011.07.24
가난한 자 같으나 - 김광영 목사  (0) 2011.06.10
시편 32편 허물에 사함을 받은 자 <김광영 목사>  (0) 2011.03.24
씨름하는 자  (0) 2011.03.14
수넴여인과 엘리사 <김광영목사>  (0) 2011.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