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e Like Glacier 빙하처럼 움직여라!

가난한 자 같으나 - 김광영 목사 본문

로고스의 창

가난한 자 같으나 - 김광영 목사

시애틀항해일지 2011. 6. 10. 14:57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 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6:9-10)

 

 

바울은 6장1절의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메시지의 울림 속에 하나님의 일군인 자들(4절)의 모습을 본문처럼 그려주고 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그리스도의 일군’들은 무명하고, 죽은 자 같고, 징계를 받는 자 같고, 근심하는 자 같다. 가난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다. 그런 속에서 유명한 자요, 살아있는 자요, 죽임당하지 않고, 항상 기뻐하고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며, 모든 것을 가진 자이다.

 

전 문맥인 고후 4:8-9에서 보면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 다고 말한다.

 

세상이 알지 못한 비밀을 가진 자이다. 바울사도는 이것에 대해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이 능력을 경험하고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행 14:22)했다.

하나님의 백성 그 일군들이 받는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욥과 바울이 동일하다. 이들은 사단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하나님의 손길을 느꼈다.

하나님이 사단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욥 1:12)

하지만, 욥은 재난을 당하였을 때 이렇게 반응한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니라’(욥 1:12)

욥은 무서운 재앙이 계속되고 아내가 하나님을 저주하라고 했을 때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2:10)

사단의 계획은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이지만(욥 2:5; 살전 3:5)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영혼 깊은 곳을 치유하는 것이다.

 

욥처럼 바울도 자신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에 대해 ‘사단의 사자’라고 말한다(고후 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7-9)

 

하지만 은혜로운 목적을 위해,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임을 알았다. 약한 것들에 대해서 도리어 자랑할 수 있는 것이 내가 약한 그 때가 곧 강함이라고(고후 12:10) 말하고 있다.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 피로다’는 찬송을 지은 찬송가 작가 ‘윌리엄 쿠퍼’는 ‘주 하나님 크신 능력’이라는 찬송에게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연약한 감각으로 주를 판단하지 마라.

그분이 은혜 주실 것을 믿어라.

언쨚은 섭리 뒤에

미소 짓는 얼굴을 숨기시도다.

그분의 목적은 빠르게 이루어지리라.

매시간 펼쳐지리라.

싹은 쓰디쓰지만

꽃은 달콤하리라.

 

그리스도의 일군들의 고난을 하나님은 결코 허비 하지 않으신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인생의 슬픔을 한 단어로 압축한다면 그것은 ‘상실’이다. 우리는 모든 상실 한 것들 때문에 슬프다. 이별을 통한 친밀감의 상실, 폭력을 통한 안전의 상실, 학대를 통한 순결의 상실, 배신을 통한 친구의 상실, 전쟁을 통한 가정의 상실, 굶주림과 더위와 추위를 통한 복지의 상실, 지진과 홍수 폭격과 신종질병을 통한 생명의 상실 등이다.

 

삶이란 때로 끝없는 상실의 연속처럼 보인다.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어머니 뱃속의 아늑함을 잃는다. 학교에 들어가면 친밀하고 안정된 가정생활을 잃는다. 첫 직장을 잡으면 젊은 날의 자유를 잃는다. 결혼하면 많은 선택의 기쁨을 잃는다. 늙으면 외모와 건강과 친구들과 돈과 명예를 잃는다. 그러다 죽으면 물리적으로 모든 것을 잃는다.

 

젊었을 때 우리는 “내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지‘ 다짐하듯 말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 내 꿈이 어떻게 된 거야?“ 반문한다. 이런 많은 상실은 평범한 삶의 일부이다. 하지만, 그 너머에 영적인 상실이 있다.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의 상실, 심지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상실이 있다.

 

문제는 상실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상실을 숨길 수도 있고, 나누기를 거부할 수도 있다. 얻은 것에 비해 잃은 것은 별 것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방법도 있다. 애통하는 것이다. 애통하지 않으면 한이 맺힐 수 있다. 당신의 모든 비애가 당신 자아의 심연 속으로 직행하여 평생 거기에 응어러지게된다. 상실을 과감히 느끼고 애통하는 것이다. 충분한 눈물과 애통 속에 거짓된 안정감을 벗어버리고 내가 망가진 존재이며 하나님 한 분 밖에 의존할 때가 없다는 고통스런 진실에 도달하게 된다. 망가진 모습 속에서 새 생명이 태어난다.

 

헨리나웬의 글에 <애통할 때>에 대한 부분이 읽어보겠다.

 

애통하라. 내 백성이여, 애통하라.

당신 마음에 고통이 끊어 올라 흐느낌과 눈물로 터져 나오게 하라.

부부 사이에 존재하는 침묵을 애통하라. 친밀한 우정의 부재를 애통하라.

당신 자녀의 반항적인 태도, 친구의 무관심. 동료의 냉혹한 마음에 애통하라.

자유를 찾아 난민촌에 이른 사람들, 정의에 목말라 옥에 갇힌 사람들을 인하여 애통하라.

양식이 없고 돌보는 손길이 없고, 사람이 없어 죽어가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위해 울라.

자유와 구원을 위하여 울라. 마음속 깊이 통곡하라.

그 눈물 때문에 당신의 눈이 하나님 나라가 바로 당신 코 앞에 와 있음을 보게 될 것을 믿으라.

 

‘애통하는 자는 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라’ 주님이 말씀하셨다. 애통하여 그것을 주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다. 십자가로 우리의 모든 고난을 체휼하신 그 주님 앞에서 우리는 진정한 애통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이다.

(눅 6: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땅을 쟁기질하지 않으면 빗물이 씨앗에 가닿지 못한다. 그리고 떨어진 낙엽들을 걷어내 주어야만 낙엽에 가려진 식물들이 햇빛을 받아 성장하게 된다.

 

건강의 악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음. 친구의 배신, 사람들의 무반응, 비방, 연약함, 과로 등 여러 가지 환경이 그리스도의 일군들의 영혼을 파괴하려 든다. 상황이 때로는 너무 나빠져서 삶 자체를 포기하게 한다.

 

이 때 우리는 ‘왜?’라고 묻는다. 고후 1:9은 이에 대답한다.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우리가 이 모든 환란가운데서 하나님의 주권적 선하심을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유지한다면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자신이 처한 고난의 상황에서도 이 조그마한 겨자씨를 알아볼 수 있는 민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 겨자씨가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드는’(마 13:31-32) 말씀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그저 좌절된 꿈이 미래에 저절로 이루어지리라 믿는 순진한 낙관론자가 아니다. 또 해 아래 새것은 하나도 없다고 계속해서 말하는 비통한 염세주의자도 아니다. 오히려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보이지만, 언젠가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 처럼 정확하게 미래를 볼 것이라는 굳은 확신을 가진 소망의 사람이다.

 

고난의 첫째 목적은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신뢰하지 않을 때 일시적으로 자신이 넘어지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품에 안겨 무한한 안전을 누리게 된다.

 

슬픔에서 기쁨으로 나가는 첫 단계가 상실을 직시하고 애통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는 이것이다. 당신의 고난을 더 큰 세상의 고난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우리만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다. 남들이 고생하듯 나도 고생한다. 남들이 울듯이 나도 운다. 그리고 남들이 춤추듯 나도 춤춘다.

치유하는 것은 그 일차적 의미가 고통을 제거하는 데 있지 않고, 우리의 고통이 보다 큰 고통의 부분이라는 것, 우리의 슬픔이 보다 큰 슬픔의 부분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기독교적 삶의 방식은 이런 상실과 외로움을 없애는 것이라기보다 그것을 값진 선물로 바꾸게 하는 것이다. 우리시대는 빠른 만족과 빠른 위안을 약속하는 거짓 신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상실에 대한 뼈아픈 인식이 우리자신의 한계를 보게 하고, 한계 너머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게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그 상처가 하나님께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시는 장소였다는 것을 우리는 후에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토록 크게 넘어지도록 그분이 허락하시는 것도

고후 1:4에서 처럼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고후 8:9 ‘그리스도께서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그리스도의 일군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오늘 본문처럼 고후6:10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고통이 우리를 정금 같게 단련하고, 뿐만 아니라 주님께 받은 위로로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는 힘이 될 수 있도록 기도드리자.

 

 

 

 

'로고스의 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외롭고 고독한 세대에 - 김광영   (0) 2011.09.29
삼손  (0) 2011.07.24
쓰심에 합당한 그릇 - 김광영 목사  (0) 2011.06.10
시편 32편 허물에 사함을 받은 자 <김광영 목사>  (0) 2011.03.24
씨름하는 자  (0) 2011.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