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e Like Glacier 빙하처럼 움직여라!
마르틴부버 '나와너' /Martin Buber 'Ich und Du' / 만남과 대화의 철학자 본문
마르틴부버 '나와너' /Martin Buber 'Ich und Du' / 만남과 대화의 철학자
시애틀항해일지 2021. 3. 14. 02:42
Ⅰ. 서론
Martin Buber는 말한다. “역사는 ‘그것’의 세계가 점진적으로 확대되어가는 것을 보여준다.” 현대인들이 기술문명의 발전에 따르는 대중 사회적 상황 속에서 사람으로서의 가치와 존엄을 송두리째 잃어가는 인간소외의 위기를 간파한 철학자이다.
관계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나와그것’이라는 독백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나와너’라는 대화의 관계이다. 우리는 대화로 위장한 독백의 세계를 살고 있다고 진단한다.
Ⅱ. 근원어
부버는 말한다. “사람에게 세계는 두 겹이다. 세계를 맞이하는 사람의 몸가짐이 두 겹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몸가짐은 그가 말할 수 있는 근원어가 둘임과 발맞추어 두 겹이다. 근원어는 홀로 있는 낱말이 아니요, 어울려 있는 낱말이다... 이와 같이 근원어가 둘일 때에는 사람의 ‘나’도 두 겹일 수 밖에 없다.” 근원어는 존재를 기울여 말해진다. 근원어 「나-너」는 온 존재를 기울여서만 말할 수 있지만, 근원어「나-그것」은 온 존재를 기울여 말할 수 없다.
1. 나와 너
‘나와 너’는 관계의 근원어이다. 그것은 상호성과 직접성, 현존성, 그리고 강렬함과 언어 표현의 불가능성에 의해 특징 지워진다. 이러한 관계성 안에서만 인간성과 인간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성은 ‘나’ 혹은 ‘그’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정신은 ‘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의 ‘사이’에 있다. 나아가서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적인 것이라는 말이다. ‘너’에게 응답하기 위해서 사람은 그의 존재 전체를 바쳐서 관계성 안에 들어가야 한다.
2. 나와 그것
‘나와 그것’은 조정과 이용의 근원어이다. 그것은 인간사이(between him)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속(within a man)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전적으로 주관적이며 상호성이 결여되어 있다. ‘나와 그것’은 주체로서 대상에, 사물에 대한 사람의 간접적인 관계성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나와 너’와 ‘나와 그것’은 부버로 하여금 “대화의 삶”과 “독백의 삶”사이의 구별로 나아가게 한다.
부버에게 ‘정신’은 나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너’사이에 있다. 정신은 사람의 몸속을 맴도는 피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숨 쉬는 공기와 같은 것이다. 인간이 겪는 근본적 긴장은 ‘나와그것’의 세계와 ‘나와너’의 세계간의 긴장이다. 이것을 극복해야 한다고 부버는 본다. 진정한 통일은 양극단이 지닌 모순 속에서 그것을 포용함으로 점진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양극단의 중간적 길이 아닌, 전체가 포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Ⅲ. 관계가 세워지는 세 개의 영역
첫째,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이다. 뭇 被造物들은 우리와 마주 서서 활동하고 있지만, 우리에게까지 오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향하여 ‘너’라고 말해도 그것은 말의 문턱에 달라붙고 만다. 이 관계는 아직 어둠 속에서 흔들리며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
둘째,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삶이다. 여기서는 관계가 명백해지고 언어의 형태를 취한다. 우리는 ‘너’라는 말을 건넬 수가 있고 받을 수도 있다,
‘나와너’의 관계가 가장 뚜렷하고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이 인간과 인간의 관계이다. 인간과 인간은 전 인격적인 존재로 관계할 때 실제적인 ‘나와 너’의 만남이 일어난다. 그리고, ‘나와 너’의 사이에는 사랑의 감정을 넣어서 마주칠 때 진정한 ‘너’가 되며 그 때가 바로 진정한 대화관계가 성립한다.
셋째, 정신적 존재들(Geistige Wesenheiten)과 더불어 사는 삶이다. 우리는 ‘너’라는 말을 듣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부름 받고 있음을 느끼며 대답한다. 관계가 구름에 덮여 있으나 스스로 나타나고 말이 없으나 말을 만들어 낸다. 우리가 입으로는 ‘너’라고 말할 수 없지만 우리의 존재를 기울여 저 근원어를 말하는 것이다.
모든 낱낱의 ‘너’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너’를 찾는 마음(Du-Sinn)은 그 ‘너’가 ‘그것’으로 바뀌고 마는 환멸을 맛보게 된다. 그리하여 사람은 모든 낱낱의 ‘너’를 넘어서면서도 그들을 떠나는 일 없이 그의 영원한 ‘너’에게 이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신과의 완전한 관계에 있어서 ‘너’인 하나님이 ‘나’를 싸 가신다. 그리고 나의 유한한 지식은 팽창하여 하나님이 나를 밑바닥까지 알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모든 개별화된 ‘너’는 또다시 새 날개를 얻기 위하여 ‘그것’이라는 번데기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Ⅳ. 결론
부버는 일상생활부터 조직적 활동까지 우리 삶은 ‘나와너’보다 ‘나와그것’으로 지배되고 있음을 진단하고, ‘나와너’ 관계회복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였다. 부버는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라고 한다. 부버는 대화적 관계를 중시 여기는데, 주관을 초월함으로써 객관은 ‘나와너’가 만나는 좁은 능선을 주목하게 되는데, 거기에 ‘사이’의 영역이 있다고 본다. 부버에 의하면 ‘사이’는 여기 또는 저기가 아니고 그곳(da)이다. 또 사이는 여기와 거기를 모두 함유하고 있다. 사이는 ‘창조적 중앙’으로서 ‘나와너’는 사이에서 만나고, 나는 나, 너는 너로서 실존하며 자아를 형성한다.
인간사이의 영역은 한 사람이 타자를 객체로서가 아니라 현존하는 사건의 파트너로 관계할 때 발생한다고 본다. 그것은 타자와의 직면의 영역인데,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사람이 이해되는 과정을 ‘대화’라고 본다. 이렇게 부버는 집단주의와 개인주의의 두 극단에 대해 두 사이이 산능선과 같은 공동체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Man makes Book, Book makes Ma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의 일기들 _ 병영독서코칭 2022 _ 코칭강사 김광영 북 리뷰 (0) | 2022.12.28 |
---|---|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_숨쉬는인문학 (0) | 2022.12.13 |
삶의 한 귀퉁이를 돌아서면_ 할머니의사 청진기를 놓다 (0) | 2019.05.16 |
눈만 깜박거려도 책을 쓸수 있다 (0) | 2019.05.16 |
환희의 송가 (0) | 2019.04.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