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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2장 / 그리스도 몸의 지체 된 우리 / 김광영목사 본문

예수 사랑하심을 성경에서 배웠네

고린도전서 12장 / 그리스도 몸의 지체 된 우리 / 김광영목사

시애틀항해일지 2022. 7. 20. 08:27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기 때문이다. 미끄러져 팔을 다치게 되면, 기부스를 한다. 팔의 고통을 목이 같이 감당해 준다. 발목이 조금 삐어도 모든 몸이 불편함을 같이 느낀다. 같은 한 지체이기 때문이다. 또한, 손으로 악기를 잘 다루고, 목으로 노래를 잘 부르지만, 박수를 받는 것은 모든 몸이다. 우리는 함께 고통받고 함께 영광을 받는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다.” 우리는 이 한 몸 됨을 느끼고 있는가? 옆의 사람을 봅시다. 비록 생김새는 키가 작고 얼굴이 둥글고 모나고 학교도 다 다르고 남학생 여학생이 다르지만, 또한 선생님과 학생들이 같이 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한 분만을 동일하게 바라보는 한 몸을 알고 있는가?

기대라는 찬양에 보면 “주안에 우린하나 모습은 달라도 예수님 한분만 바라네”라고 예수공동체에 대해 말해준다. 바울사도는 유대인 헬라인 종이나 자유자 할 것 없이 한 성령안에서 한몸이 되었다고 말해준다.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차별이 없이 한 몸을 이룬 것이다.

 

 

  그런데,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다” 우리는 각각 교사로 학생으로  한몸을 이루게 하셨다. 하나님은 왜 이토록 다양한 모습을 우리 공동체에 주셨을까? 고전12:7에 보면 “한 성령안에서 여러 은사들을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심으로 유익하게 하려는 것이다” 라고 했다. 서로 다른 모습으로 섬김으로 공동체를 유익하게 하고 서로를 돌보게 하신 것이다. ‘다르다’는 것이 ‘나는 너와 노는 물이 달라’ 식의 자신만의 선을 그어놓고 교만에 차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다르다’는 것이 ‘그래, 나는 니네들과 달라’ 하며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자신을 자학하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각기 고유한 역할과 재능과 은사를 하나님앞에서 부여 받았다.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그의 뜻대로 우리에게 다양한 은사를 나누어 주셨다. 우리가 ‘원해서’이기 이전에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뜻대로 각각 서로 다르게 한 공동체에 두셨다. 나를 이모습 이대로 학생회에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발이나 귀처럼 말할 수 있다. 만일, 발이 말하기를 나는 손처럼 유용하지도 예쁘지도 않으니까 몸에 붙지 않았어 라고 말해도 몸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귀가 나는 눈에 비해서는 쌍꺼풀도 없고, 예쁘고, 유용하지않으니까 몸에 붙지 않았어 해도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모두가 눈만 되면, 어디서 들을 것이며, 또 모두다 귀만 되면 어디서 냄새를 맡을 것인가? 눈만 가득한 얼굴을 상상해 보라. 귀만 가득한 얼굴을 상상해보라. 그러기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그 원하시는 뜻대로 각각 몸에 두셨다. 나는 찬양인도 안 시켜주는 거예요, 나는 왜 임원 안 시키주는 거예요. 하지만, 찬양하는 사람도, 임원을 따라주는 회원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 반대 경우도 있다. 눈이 손보고 야 너 길게 다섯 개나 나와 가지고 도대체 하는게 뭐야 너는 쓸데 없이 거추장 스러울 뿐이야 라고 말하거나, 머리가 발보고 “야 발 넌 그 밑에서 흙이나 밟고 발꼬랑내나 내고 있으니 참 한심하구나, 차라리 이 지구를 떠나다오”할 수 있는가? 그렇 수 없다. 발이 없으면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손이 없으면 제대로 먹지도 못한다. 병원에 발이나 손을 다쳐서 입원한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우리는 자신의 잘난 맛 때문에 자기 눈에 무능해 보이는 사람을 함부로 질책하고 “저 인간 왜 사는지 모르겠어?”하고 무시하거나, 비난하지는 않는가?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두가 다 필요하고 소중한 지체들이다.

 

  이뿐 아니라, 도리어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준다. 손톱을 생각해 보라. 손가락 끝에 붙어서 손톱만 자라서 깍아 줘야되지 않는가? 하지만, 만약 손톱이 없다면, 손이 얼마나 아프고, 물을 집거나 귀를 후비거나, 뗑꼬를 때릴 때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매니큐어는 눈에 바르거나 손등에 바르지 않는다. 바로 그 손톱에 발라준다. 악세사리가 달리는 곳을 보라 귀걸이 팔지 목걸이 같은 것들은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몸의 지체에 달아준다. 우리가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은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준다.

 

  하나님의 섭리는 약한 것들 도리어 더 요긴하게 쓰시는 것이다. 내가 맡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일, 혹은 별 것 아닌 것 같은 나의 은사가 정말 필요하게 요긴하게 쓰인다는 사실을 잊지말자. 맹장이 아무필요도 없어 떼어 내어 버리는 사람도 있지만, 맹장이 없으면, 우주 여행을 할 수 없다. 맹장도 우리보기에 불필요하다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다 필요해서 몸에 두신 것이다. ‘사이먼 버찌’의 주인공을 기억해 보자. 키도작고 못생긴 작은 아이라도 숨오래 쉬기 하나는 잘했는데, 그가 작은 키를 가지고 숨을 오래 잘 쉬었기에 강물에 침몰한 버스의 아이들을 다 구해낼 수 있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