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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타신 예수님 본문
대조되는 두 장의 사진
우주의 왕이시지만 겸손하여 나귀를 타신 예수님.
세상을 호령하기 위해 군마를 탄 나폴레옹.
본문: 마태복음21:1-11
제목: 나귀를 타신 주님
Message
1. 제자들을 보내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워 와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말씀하셨다.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순례자들이 걷는 길은 여리고를 지나 베다니(예루살렘서 2-3km) 벳바게(1-2km)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게되어 있다.
주님은 감람산 동편에 있는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 둘을 반대편 마을 벳바게로 보내셨다.
그런데,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주가 쓰겠다는 말은 그 나귀 주인이 필요해서 데려간다는 말이다.
마가복음에서는 이 사건을 아주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볼 것이라고 언급되어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라는 신성한 목적을 위해 사용될 나귀는 세속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은 것이어야 했다. 그러므로 그 나귀 주인은 주님께 아직 한 번도 타보지 않은 나귀를 제공했다.
예수님은 왜 많은 짐승들 중에 하필 나귀를 타고자 하시는가?
이는 선지자 스가랴9:9의 말씀을 이루려하심이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스가랴는 예루살렘에 임할 메시야는
1)왕이며
2)겸손하신 분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마태복음만 나귀새끼를 언급하는데, 이것은 이 사건이 ‘나귀새끼’가 나오는 스가랴 예언의 성취임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스가랴는 메시아가 평화를 위해 나귀를 탈것이라고 했는데 이 예언은 주님의 예루살렘입성을 통해 성취된다.
또한, 이 사건은 야곱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창49:10-11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것이며”
야곱이 실로 곧 메시아를 언급한 후 나귀새끼를 언급한 것을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실 실로 평화의 왕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은 강력한 군사적 정치적 메시아가 와서 그들을 로마의 지배와 헤롯의 폭정에서 구해주리라 기대했지만,
주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 그분은 병거와 준마가 아닌 온유와 겸손의 나귀새끼를 타셨다.
2. 예수의 명에 순종하는 제자들
나귀를 데려 오라는 말씀에 제자들도 즉시 순종하고 심지어 나귀의 주인도 순종한다.
“주가 쓰시겠다”는 말 한마디에 선뜻 나귀를 내 놓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순종과 헌신을 말해준다.
3.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다.
무리의 대부분이 그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가지가 종려나무 가지였다고 언급한다(요12:13).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친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그들이 부른 노래는 시 118:25-26에 나오는 노래이다. 해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과 장막절이 되면 예루살렘을 순례하며 “순례자”의 시를 노래했다. 그들이 부른 노래가사인 “호산나”는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시118:25)라는 외침이다.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란 말은 “가장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이다.
갈릴리로부터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 말씀을 쫓아온 무리들의 환호성이다.
반면, 예루살렘 사람들은 유대인의 왕이 탄생했다는 소식에 ‘소동하였던’ 때처럼(2:3) 이번에도 소동하고 있다. 그들은 열렬한 환영 때문이 아니라 우려 때문에 소동한다.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이는 누구뇨?”라고 묻는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알려져 있지 않았던 외국인이나 마찬가지였다.
무리는 “갈릴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고 소리친다. 바로 갈릴리 출신 무리들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자신들의 선지자”로 예수를 소개하는 것이다.
이 무리들은 그 주간 동안 예수를 지지하는 사람들(마21:46)과 예수님에 대한 십자가 처벌 을 요구하며 외치는 다른 사람들(27:20이하)사이에 벌어질 태도의 양극화를 예견하고 있다.
우리는 이 양극화되는 두 종류의 무리를 본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귀를 풀러가는 제자들. 선뜻 나귀새끼를 내어놓는 나귀주인, 그리고, 예수님을 환영하는 무리들.
반면에, 예수의 입성을 인해 소동하는 예루살렘무리들.
우리는 과연, 주님을 어떻게 맞아 들이고 있는가?
그분을 우리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모심에 순종과 환호로 맞이 하는가?
아니면, 불편한 침입자처럼 여기며 소동 하고 있는가?
주님은 평화의 왕으로 우리의 마음 가운데로 오신다.
우리 시대는 어떤가? 복음은 환대받기도 하지만, 거절당하기도 한다.
복음을 아는 우리가 먼저, 호산나를 외치며 알지못하는 자들에게 예수를 소개하는 무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Point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조롱을 받은후 죽임당할 것을 아셨지만(마20장) 잃어 버린 영혼을 위한 대속물이 되고자 평화의 왕으로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다.
우리도 그 주님의 뒤를 따르는 자로 그분을 환호하며또한,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섬기는 자로 오신 그분의 본을 따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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