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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3:1-6 사데교회

시애틀항해일지 2008. 11. 29. 10:24

 

 

제목 : 사데교회

본문 : 계3:1-6

 

김광영 목사

 

※ 마음문을 열며

 

우리의 신앙은 죽어있는가? 살았는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강가에 죽은 고기는 물에 떠 내려오고 살아있는 고기는 역행하며 물결을 거스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신앙이 살았다면, 세속의 시류를 거스르는 생명력이 드러날 것이다. 사데교회에 주신 말씀으로 우리의 신앙을 다시금 점검하고 도전받자.

 

※ 본문과 씨름하며

 

1. 죽은 교회

 

‘사데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자로다’라고 주님은 사데교회를 이름은 살았으나 실상은 죽었다고 말씀하신다.

이름이 살았다는 말은 ‘잘 알려져 있고, 사람들이 바라볼 만한’ 그런 교회라는 것이다. 겉모습은 유명하고 평화로운 교회다. 하지만, 주님이 보실 때 그 평화가 공동묘지의 평화와 같다. 실상은 죽어있기 때문이다. 교회에 출석해서 모두가 앉아 있으나 실상은 시체들이 앉아있다는 것이다. 교회좌석의 죽음이다.

어떤 의미에서 죽음인가? 주님은 1절 중간에 ‘내가 네 행위를 안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의 행위들, 기도하고 교회출석하고 성경공부하고 찬송하고 구제하고 선교하는 행위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사데교회는 말만하는 교회가 아니라 행동이 있다. 하지만 그 행위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실상은 죽었다고 말씀하신다.

2절에 보면 좀더 예리하게 드러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주님은 실천을 말씀하실 때 ‘내 아버지 앞에서’라는 구절을 덧붙이셨다. 하나님앞에서 온전한 행위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온전하다는 말은 채워지다라는 것이다. 컵에 물이 꽉 차있는 것처럼 가득 채워진 것이 온전하다. 하나님께 표준이 있다. 사람들이 이러저러한 행위들을 하고서 뭔가 한 것 처럼 떠벌리고 인정해 준다해도 하나님 앞에서의 표준에 미달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는다. 부자의 많은 돈 보다 과부의 두 렙돈을 온전히 받으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자.

마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사람들의 칭찬을 위해 행동할 때 주님은 그것을 기뻐받지 않으시는 것이다. 사데교회는 그렇게 많은 행위를 했으나 하나님 보기에는 0점이었다.

 

2. 그 옷을 더럽힌 교회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버가모와 두아디라는 다수는 문제없고 소수가 문제였으나 사데는 반대로 다수는 문제있고 소수가 문제없었다.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있을 뿐이다.

옷을 더럽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 당시 신자들이 그 주변의 세속문화에서 뒹굴면서 더러워졌다는 것이다. 사데가 어떤 곳이기에 그들의 옷이 이토록 더러워졌나? 사데는 주전1200년에 창건되었으나 주후17년 지진으로 폐허가 되었다. 그 후 티베리우스황제의 도움을 받아 재건축외었다. 회복이후 너무 아름답고 큰 도시라 사데는 ‘위대한 도시’라는 별명이 붙었다. 사데에 신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싸이벨레’였고 이를 위한 신전이 세워졌고 아직도 그 신전의 기둥이 남아있다. 사데는 무역의 중심지로 돈이 많았다. 많은 돈에 싸이벨레 신을 섬기는 과정에서 도덕적으로 해이해진 것이다. 과소비와 도덕적 문란이 굉장했다.

사데교회는 서머나 교회나 버가모교회처럼 외부로부터의 핍박이나 두아디라 교회처럼 내부의 유혹도 없었다. 황제숭배의 정치적 핍박이나 발람 니골라당 이세벨같은 자들도 없었다. 그런데, 사데 교인들은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에 나와 헌금도 봉사도 했지만, 교회만 나가면 밖에 있는 사람들과 같이 뒹굴어 버렸다. 같이 사치하고 과소히하고 도덕성이 땅에 떨어졌다. 주님은 ‘그 옷을 더럽혔다’고 하신 것이다. 겉으로는 살았으나 실제로는 죽었다. 사데교회가 죽었다는 것은 주전17년의 지진만큼이나 충격적인 것이다.

우리모두 세상에서 함께 살아간다. 교회에서는 거룩한 모습으로 예배하고 말씀듣지만 당장 나가보라. 이 세상의 현란한 쾌락의 유혹들이 손짓하지 않는가? ‘한번쯤 어떻겠는가?’ 딱한잔만 그렇게 한걸음을 들여놓으면 자꾸 더 들어가게 되고 급기야 ‘이왕에 더러워진 몸, 이제야 어쩔 수 없지’ 하며 죄악속에 몸을 던진다. 사데교회가 옷을 더럽힌 것은 바로 이런 식이었다. 딱 한번만 - 한번만 더 - 이왕 버린몸...

 

3. 죽게된 이유와 대책

 

왜 이렇게 되었나? 3:2에 ‘너는 일깨워’라고 하였다. 깨어있으라는 것이다. 깨어라고 외치는 것은 잠들었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깊은 잠에 빠진 것이다. 그렇다면 깨는 것은 무엇인가? 말씀대로 ‘하나님 앞에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죄악의 유혹에 경계하며 깨어있는 것이다. 주님은 깨라고 하신후 ‘만일 일깨지 않으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주님은 징계하기 위해 사데교회에 오시겠다는 말씀이다.

사데성의 성문과 성벽은 최대한 강하게 만들었다. 유일한 약점은 보초 한 명이 지킬 수 있는 성벽의 작은 구멍이다. 그 구멍으로 고레스가 주전549년 군대를 투입했고 안티오커스가 주전 218년 군대를 투입했다. 사데는 ‘도적같이’임하는 파멸을 체험했다. 주님도 회개하지 않는 사데교회에 이렇게 ‘도적같이’ 임해서 징계하시겠다고한다.

전염병이 돌 때 감염되지 않기 위해 면역주사, 예방주사를 맞는다. 사탄은 우리에게 형식적인 신앙의 확신 주사를 놓는다. 신앙은 병에 걸리는 것과 같다. 예수를 위해 미쳐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대충대충해서는 자신도 살지 못하고 남들도 바꿀 수 없다. 사데교회는 형식적인 신앙의 확신주사를 맞고 있었기에 참된 신앙의 시각에서 볼 때는 죽은 것이다.

이런 교회에 희망은 없는가?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외친다. 열심을 품고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돌아서야 한다. 죄악을 끊어버려야 한다. 눈물한번 흘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의지적으로 끊어내야 한다. 그리고 신앙의 뜨거운 열정을 품어야 한다.

 

4. 이기는 자에게

 

‘이기는 자는 이와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않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흰 옷’은 그 옷을 더럽히지 않고 순수한 신앙을 지키는 데 승리했기에 주시는 것이다. 사데교회에서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자는 에녹과 노아의 특권을 누릴 것이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앞에서 걷게될 것이다.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흐리지 않는다.’ 마10:32-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 정곡을 콱찌르며

 

- 도적같이 임하실 주님을 기억하며 신앙의 경성함으로 깨어나자. 살아있는척하는 죽은마네킹같은 신앙이 아닌 또렷또렷한 신앙의 눈을 가지고 일곱영과 일곱별을 붙드신 주님앞에서 깨어있도록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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