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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rch Story

희생양

시애틀항해일지 2011. 4. 17. 18:01

 

 

 

사순절기간은 예수님의 부활절을 기준으로 40일전부터 그 고난을 묵상하는 기간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핵심은 마지막 한주 바로 고난주간으로 집약되고

성 금요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신 그 날이 핵심이 되고 있습니다.

이 고난주간 십자가의 희생양되신 그리스도를 묵상하며 말씀을 준비해 봅니다.

 

1.예수의 무죄선언 (13-16)

 

빌라도에 대제사장들과 관원들, 백성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판결하고자 한 내용이 무엇인가?

‘이 사람을 백성을 미혹케 하는 자라하여 내게 끌고 왔으나,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고, 헤롯도 그러하다. 저의 행한 것이 죽일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죽일 일이 없음이 명백함에도 그를 없애려고 외치는 무리들이다. 그 모든 상황을 침묵으로 받아들이시는 예수님.

한결 같이 우리와 같이 시험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과 소외를 체휼하시는 분이 되셨다.

우리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께 나아가자. 우리 삶은 또한 어떤가? 의와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인가? 자신의 실수와 아집과 잘못으로 죄의 값을 치루고 있는가?

 

예수님은 무죄다. 유죄인 자는 그를 십자가형에 처한 자들이다. 세례요한도 무죄한 자이고 죄가 있는 사람은 그를 참수형에 처한 자이다.

 

 

2.무리의 큰 소리 (17-23)

 

이 말을 들은 무리들의 반응은?

일제히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그 내용인즉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다시 저희에게 말하고, 세 번째 말한다.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행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지만, 무리의 태도는 동일하다.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큰 소리로 재촉하며 십자가에 못박기를 구한다.

그 결과로 저희가 이겨, 빌라도가 저희 구하는대로 하기를 언도한다.

 

속죄양은 구약의 희생제물인 아사셀양을 떠올리게 한다.

이 제의는 이스라엘의 모든 죄악을 짊어진 염소 한 마리를 황야로 내쫓는 것이다. 대제사장이 염소의 머리에 두 손을 얹는데, 이 동작은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을 그 동물에게 전이시키는 동작이다. 이 제의의 효력은 그 염소와 함께 모든 죄악이 추방되었으므로 공동체는 죄악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하는데 있다.

 

대제사장이 거룩한 옷을 입고서 1년에 한번씩 성소의 휘장을 젖히고 법궤가 있는 곳에 속죄소에 들어간다.

수송아지의 피를 갖고서, 속죄소에 들어와 1년 동안 지은 모든 백성의 죄를 대속하고, 나와서 숫염소를 하나를 택하여 제사장이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한다.

이스라엘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죄를 모두 고하고, 그 모든 백성의 죄, 모든 죄를 그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하여 둔 사람이 이 아사셀 염소를 이끌고 무인지경의 아무도 없는 광야에 데리고 가서 그 염소를 놓고 올 때, 모든 백성의 죄와 불의가 다 그 염소가 대신 지고 버림을 당하는 양이 바로 아사셀의 양이라고 부릅니다.

 

 

시편 35:9 ‘그들은 까닭없이 날 미워한다.’

이 간단한 표현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에게 적용된 경우이다.

아주 평범하게 보이는 이 말은 희생양을 향한 적의의 본질적인 성격을 잘 표현하고 있다. 희생양을 향한 적의에는 까닭이 없다.

 

빌라도는 왜 무죄한 자를 십자가에 넘어주었나? 빌라도는 민중의 동요가 두려웠다. 그 민중의 동요를 막아주는 일종의 긴장완화, 즉 희생적 ‘카타르시스’가 있다.

 

전문맥 눅 23:12에서는 ‘헤롯과 빌라도는 전에 서로 원수였으나 당일에는 서로 친구가 되었다’고 기록한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헤롯 앞에 잠시 출두한다. 헤롯과 빌라도 둘이 예수님의 죽음에 관여하고 있는데 바로 예수님의 죽음으로 두 사람은 가까워지게 된다.

이들이 화해한 것도 결국 집단 살해에 가담한 사람들, 즉 박해를 하고도 뉘우치지 않는 사람들이 혜택을 본 카타르시스 효과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3.바라바의 석방과 예수의 넘겨짐 (24-25)

 

바라바를 놓고 예수를 넘겨주어 저희 뜻대로 하게한다. 이 바라바는 누구인가? 19절을 보니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혔고, 25절에 보니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

 

명백한 죄인인 바라바는 풀려나고 그 자리에 죄 없으신 예수님이 가신다.

하나님의 진노 앞에 선 이 죄인이 져야할 분노와 심판을 십자가로 친히 대신 당하신 주님이다. 그 주님 앞에 은혜에 감사하며 기도하자.

 

예수의 무죄를 알고 놓으려 하는 빌라도 그를 없이 하라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무리. 민란과 살인으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바라바의 놓임과 죄 없는 예수님의 넘겨지심 긴박하게 돌아가는 이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은 성취되고 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서 쓰고 있는 표현이 있는데 시편 118편에서 따온,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표현이다.

이 구절은 속죄양의 추방이야기 뿐만 아니라 추방된 자가 공동체 전체의 핵심이 된다는 마지막 반전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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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지라르 철학자의 책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티아나의 아폴로니우스는 2세기의 유명한 정신 지도자였다. 에베소에 퍼진 페스트를 치유한 기적이 필라로스트라토스가 남긴 ‘티아나의 아폴로니우스의 생애’라는 글로 남아있다.

 

그는 에베소 사람들이 페스트에 대해 어떻게 손을 써야할지 모를 때, 온갖 대비책을 강구했지만 백방이 무효였을 때, 아폴로니우스에게 부탁했다.

 

그는 사람들을 모두 극장으로 데려갔는데 거기 수호신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거기 거지 한 명이 있었는데, 넝마를 걸친 그는 빵 부스러기가 들어있는 주머니를 하나 들고서 장님처럼 눔을 깜박이고 있어 왠지 모를 혐오감을 주었다.

아폴로니우스는 에베소 사람들에게 말했다. “돌을 들어 모든 신의 적인 저 녀석에게 돌을 던지시오”

사람들은 자선을 간청하는 누가 보아도 분명히 애처로운 그 사람을 죽인다는 생각에 분노를 금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폴로니우스는 굽히지 않고 거지에게서 물러서지 말고 계속 돌을 던지라고 그들을 몰아 부친다.

몇 사람이 먼저 거지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하자 그때까지 장님처럼 두 눈을 깜박이던 그 거기지 갑자기 이글거리는 두 눈을 부릅뜨고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에베소 사람들은 거지가 악마라는 사실을 확신하고자 자발적으로 돌을 던지기 시작했는데 얼마나 많은 돌을 던졌는지 거지 시체 주변에 커다란 돌 무더기가 만들어졌다.

 

에베소 사람들은 지도자의 말을 따를수록 더 신경질적 무리로 변하여 그 불쌍한 거지를 통해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는데 성공한다.

이것에 대해 ‘고정농양’이라는 표현을 쓴다. 몸을 정화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어느 한 곳의 상처가 곪도록 하는 치료법이다.

 

에베소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강열한 전염병에 대해 이 지도자는 희생양을 지목하여 돌을 던짐으로 폭력욕구를 충족시켜준다. 일단 자신들의 욕구가 총족되었다고 느끼며 일단 고정농양이 그 역할을 다하고 나면, 에베소 사람들은 돌림병에서 치유되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폭력이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는 희생양을 삼으려는 사람을 악마로 만들어야 했다. 그리하여 그 지도자는 마침내 성공한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 즉 첫 번째 돌을 획득한다. 조금전 까지만 해도 거지를 동정하던 그 사람들이 맹렬한 경쟁 속에서 처음의 태도와는 달리 너무나도 다른 냉혹한 모습을 드러낸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거지의 눈에서 두려움과 함께 공격성까지 번득이는 동물의 눈빛을 본 에베소 사람들은 이 순간 그것을 일종의 도발임을 간주한다. 그리고 거지가 바로 악마라고 믿어버리는 순간이다.

 

거지가 돌에 맞아 죽는 장면은 십자가형을 떠올리게 한다.

이 불쌍한 사람이 악마처럼 흉악해서 돌을 맞아 죽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돌을 맞았기 때문에 흉악한 모습의 악마가 되었다. 에베소 사람들은 하도 분에차서 돌을 던지다 보니 거지의 시체는 ‘곤죽’이 되어있었다.

이렇게, 지구 전체에 퍼진 신화에는 흑사병과 같은 재앙으로 인한 엄청난 공포 속에서 행해졌던 집단 폭력에 대한 날조에 가깝다. 이 때 희생양은 나병환자나 이방인 불구자와 같이 사회의 아웃사이더, 사회에서 내쫓긴 자들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극단적인 위험에 처하면 다시 인간 희생양을 이용하였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보면 테미스토클레스 장군은 군중의 압력에 못이겨 페르시아 포로들을 희생의 제물로 쓰도록 허락하였다.

 

사탄은 이렇게 사회의 무질서 속에서 평정을 찾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무고한 자를 비난하도록 부추기는데 항상 성공해 왔다. 사탄의 이런 희생양 메커니즘이 인류문화를 지배해온 것이다. 인류문화의 기원이 바로 이 살해에 있기 때문이다.

집단 전체의 폭력이 한 사람의 희생양에게로 집중되는 ‘고정농양’이 일어나고, 이를 통해 폭력은 진정되고, 와해된 집단의 질서가 되살아난 것이다.

 

예수님께도 한 여인을 데려온 사건이 요 8:3-11에 있다.

율법학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데려와 ‘모세의 법에는 이런 죄를 먼한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 햇는데, 주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물었다.

주님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시다가 고개 드셨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에게 첫 번째 돌을 던져라’

이 말씀앞에 어른부터 아이까지 다 가버리고, 여자만 남았다.

‘그들이 다 어디갔느냐?’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말라.’

 

주님은 대중들의 무자비한 폭력으로부터 죄인된 여인도 구출해 내신다.

 

세계의 곳곳에서 수많은 민화와 신화들 속에서는 공동체를 와해시키는 자를 지목해 돌로 치고, 돌로친 무리는 무죄한 자가 된다.

유죄인 희생양과 무죄인 박해자들 폭력이 하나의 공식처럼 시대를 이끌어 온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다른다. 무죄한 희생양과 유죄인 박해자들을 밝혀낸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의 무고함을 만천하에 알려준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폭력을 정당화해 온 사탄의 권세를 무력화시킨다.

십자가형에 넘겨진 무죄한 예수님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다.

 

이사야 53장

1 우리가 1)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2)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향하여 외친다.

요 1:12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구약의 제사는 완전하지 못했다.

히 10장

1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3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하지만, 희생양 그리스도의 제사는 완전한 것이었다.

히 10장

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결론

 

롬 5:1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요한복음 21장 (18-19)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마지막으로 그의 사명에 대해 말씀하신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제멋대로 다룰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시는 그 순간은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제부터의 이들은 그 분이 '하시는'것이 아니라 그 분이 '당하시는'것입니다. 적들은 그 분을 채찍질하고, 가시관을 씌우고, 침을 뱉고, 조롱하고, 발가벗기고, 벌거숭이 상태로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적들의 손에 넘어간 그 순간부터 고난은 시작되고 그 고난을 통해서 그 분의 소명은 실현된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행하신 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남들이 당신에게 행하는 일을 통해서 당신의 사명이 완성된다는 사실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이 내 삶의 대부분 역시 남들의 나에 대한 행위로 결정되며, 따라서 이는 곧 고난을 받아들임에 해당된다.

예수님께서 넘겨져 고난을 당하시고 그 고난을 통해서 당신의 거룩한 지상과업을 완수하셨다는 사실은 유념해두어야 할 소식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시는 말씀도 동일하다. 늙어서.. 성숙될때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감을 당하는데 자신을 내어주게 되리라는 말씀이다. 당신의 길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에게도 베드로처럼 그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영광을 얻기 위해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데로 다니던 자리에서 주님이 원하는 자리 또한 남들이 원하는 자리에 자신을 내어주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겟세마네의자리이다.

죄없는 자로 죄인의 자리에 넘겨줌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이번 고난주간특새에 참여하여 깊은 묵상으로 나아갑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가 애매한 고난속에서도 주님을 생각함으로 참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벧전 2:19-21>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눅 23:13-25

예수를 넘겨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