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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함께 하는 성경말씀 / 갈라디아서 2장 20절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본문

예수 사랑하심을 성경에서 배웠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성경말씀 / 갈라디아서 2장 20절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시애틀항해일지 2022. 3. 6. 14:18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 2:11-21)

 

 

마음문을 열며

 

교회에 왜 오는가? 누군가는 이런 대답을 했다. “예배 마치고 집에 빨리가고 싶어서예배를 안드리자니 하나님이 번개를 치든지 내 몸에 병이 나게할 것같고, 예배를 드리자니 졸립고 다른 하고 싶은일 해야할일은 많고 그래서 빨리 어떻게 예배를 마치고 예배당을 나가면, 속이 편하고 즐겁게 놀 수 있고, 어딜 가도 마음은 편해지는 것 같기 때문은 아닌가?

예배는 왜 드리는 것입니까? 우리가 예배를 드려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것입니까? 기도회를 참석하고 서면전도를 나가고 성경을 몇장 읽고 뭔가 착한일을 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면, 거짓말을 줄이고, PC방 가는 시간과 돈을 줄여 친구를 도우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성경은 단호하게 아니다 라고 말한다. 성경에 많은 율법이 주어졌는데, 그 율법을 다 지켜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본질한 율법을 다 지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바닷 게가 게아들 게딸에게 너희는 똑바로 걸어라 라고 말하면서 자신은 옆으로 걸을 수 밖에 없죠? 게딸 게 아들도 옆으로 걸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옆으로 걸어서 게가 아니라, 게니깐 아무리 앞으로 걸으려 해도 옆으로 걸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이들 보면, 과자하나를 가지고, 자기것 사다랄고 어머니 조르기는 쉬운데 그 과자를 남에게 나눠주라 할 때 뭔가 표정이 변하고, 손이 굳어지고, 무척 힘들어 하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도 친구가 나를 화나게 할 때 화 내기는 쉬워도 화 참고 인내해주기는 얼마나 어렵습니까? 내가 화 내어야지 꼭 화 한번 내봐야 겠어 결심하지 않아도 화는 저절로 터져나옵니다. 친구를 이해하고 사랑하기는 얼마나 다짐하고 인내하고 해도 잘 되지 않는 것을 느낍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우리의 모습입니다. 안테나를 잃어버린 개미처럼 열심히 가긴 가는데, 자기 집을 찾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베드로를 야단친 바울

 

베드로 사도는 이방인 사람들과 식사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 친구 유대인 몇이 오자 그는 그들에게서 무슨 말을 들을까봐서 이방인과 식사하지 않았습니다. 그 유대인들은 누구든지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율법주의자 였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얻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지, 할례나 율법이나 우리의 행위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베드로처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하면서 실제로는 다른 이방인도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아야 구원얻는 것 처럼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헌금을 내야 구원받고, 교회에 주일날 와야 구원받고 혹시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을까 하여 염려하고, 우리는 구원받았기에 감사해서 헌금도 드리고, 구원의 은혜를 찬송하고 감사하기 위해서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왜 예수를 믿습니까? 구약성경의 율법을 온전하게 지켜서 구원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만을 지켜서 구원을 받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없애 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시고 그분을 믿을 때에만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얻음

 

세상에 마음을 곱게써야 천당을 가지 예수믿는다고 천당가는가? 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무엇이라 말해 주어야 하는 것일까요? 마음을 곱게 쓴다고 해도 50100보 차이입니다. 50100보는 중국고사에서 나왔는데, 전쟁을 하는 군대가 적군에게 밀리자 목숨의 위협을 느낀 얼마의 군인들이 삼십육계 즉 도망을 쳤습니다. 전쟁의 장군이 밀리던 아군의 사기를 북돋워 결국 역전승을 했는데, 그 때에 도망한 군사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한 병사가 100보를 도망했는데, 자기는 50보 밖에 안갔다고 자기의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장군이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1000보를 가던 1보를 가던 적군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등을 돌려 도망한 것은 도망한 것인데 자신은 다른 병사보다 조금 낫다고 뻐기는 것이지요.

 

사람이 아무리 선을 행한다 해도 완전하신 하나님의 눈에는 다 죄인입니다. 거짓말을 한번도 안하고 사는 사람있습니까? 컨닝한번도 안한 사람있습니까? 친구 한번이라도 욕 안하고 미워하는 마음 품어보지 않은 사람있습니까? 하지만, 50100보차이입니다.

그 많은 성경의 율법들을 다 지켜 구원을 얻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원래 율법이 구원을 얻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깨달으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죄를 짓고도 죄인줄 모르는 타락한 본성의 인간이기에 이것은 죄니라라고 경계선을 그어주신 것입니다. 경계선 그어놓았다고 우리가 안 넘어 갑니까? 얼마든지 넘어갑니다. 그 선은 우리가 경계를 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식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가 교회에 왜 있습니까? 봐라 죄지은 사람은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야 한다는 공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사형틀입니다. 우리 나라 같으면, 올가미나 전기의자같은 것으로 교회에 올려 놓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죄 지으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에 십자가가 있습니까? 우리의 죄를 예수님이 담당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죄값으로 당할 고통을 그분이 대신 담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다는 복된 음성 바로 복음이 교회에 있기 때문에 십자가가 교회당에 세워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착하게 살고 율법을 지켜서 다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헛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은 헛되지 않은 것입니다.

바울 선생은 나는 그리스도와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합니다. 죄인된 자신의 모습은 십자가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신 것입니다. 그분은 나를 사랑하여 나를 위해 그 몸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속에 참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왜 살고 있습니까? 나를 위해 죽어주신 그 분의 은혜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사람이 그를 살리기 위해 물에 뛰어 들었다가 그를 잡아서 땅으로 끌어 올리고 자신은 힘이 빠진 상태에서 급류에 휩쓸려 내려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죽어야 할 자리에 누군가가 대신 죽어준 것입니다. 이제 그 사람은 자신을 위해 몸을 내어준 사람으로 인하여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하고, 헌금하고, 찬송하는 것은 바로 물에서 건짐받은 사람이 그 은혜에 감사해서 그것을 표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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