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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 이야기

가정의 주인 예수님

시애틀항해일지 2008. 4. 5. 08:53

계 3:20-21

제목 : 라오디게아교회

본문 : 계3:14-22

 

※ 마음문을 열며

 

   우리는 우리자신을 모습을 얼마나 정확하게 보고 있는가?

   사람들은 큰 집에 살지 못하는 것을 인하여 불평해 하지만, 자신의 마음이 좁은 것은 만족해 한다.

   옷을 사서 예쁘게 꾸미는것에 안달해 하지만 선행으로 아름다움을 치장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육신의 배를 위해 먹을 것을 찾는 일에 민감하지만, 배고픈 영혼을 위해 말씀을 먹는 것에는 갈급함이 없다. 오늘 라오디게아 교회를 찾아오사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우리의 현재의모습을 진단해 보기를 바란다.


※ 본문과 씨름하며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마지막 교회다. 16절에 보면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라고 했는데 그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미지근하다. 이것은 15절의 ‘네가 네 행위를 아노니’의 그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라오디게아에 대해서는 칭찬이 없다.  행위는 있었지만 칭찬할 만한 것이 없다. 그들은 미지근하였다. 예수님을 보면 비유의 천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그들 마음에 뿌리를 내리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들 주변의 환경을 보며 생각나게 하셨다.

 

  1. 미지근한 교회

 

   라이디게아는 골로새와 히에라볼리와의 사이에 있는 지역이다.  히에라볼리 지역은 온천이 있다. 석회수가 흐르고 있다. 물이 떠거운 곳이 있다. 히에라볼리는 뜨거운 물이 �구친다. 이것이 라오디게아 올 때 미진근해진다. 그것이 역겨운 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지역에 흐르는 물의 상태를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이 비유를 사용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앙은 주변의 환경과 같았다. 미지근하다. 뜨겁다는 것이 주님에 대해 불이 붙은 상태라면, 차갑다는 것은 전혀 감각이 없이 냉냉한 상태, 복음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상태를 말한다. 미지근함은 열정도 그렇다고 적대감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어떤가? 주님의 교회를 향하여 솟구치는 열정이 있는가? 아니면, 교회라면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예수 ‘예’자도 듣기 싫어하는가?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교회에는 나오는데 뜨거움을 잃어버리고, 그렇다고 1주일에 한 번 드리는 예배인데 빼먹지는 않고 있는 라오디게아의 미지근함 속에 있지 않은가?

   꾸준히 주일 에배에 참석하고 의례껏 헌금 시간에 의무로 헌금주머니에 돈을 넣고 모든 신앙생활이 끝난 것 처럼, 평소에는 ‘주님 날 건드리지 마쇼!’하고 있지 않는가? 찾아오지도 말고 그대로 냅둬 라고 요구하고 있지 않는가? 어쩌다 은혜의 말씀에 가슴이 뜨거워지면 혹시 예수에 미쳐서 기도하느라 전도하느라 내 삶이 망가질까 염려해 하며 겁을 내고 예배 마치기가 무섭게 나가버리고 있지 않는가?


   복음에 대해 아예 차갑게 부인함다면, 언젠가 주님의 사랑이 부딪칠 때는 뒤집혀 새 사람이 될 수도 있을 텐데말이다. 복음서의 세리나 창년들은 냉냉하였지만, 복음에 부딪혀 변하여졌다. 차라리 그런 사람들이 변화의 가능성이 많다. 3:15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그것은 뜨거운 것에 대한 소원임과 동시에 미지근한 것에 대한 주님의 탄식이다.

   주님은 3:16 ‘네가 이 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주님은 역겨워 토해내겠다고 하신다. 주님의 목구멍에 당장이라도 토할 듯이 우리 신앙의 모습이 걸려있지는 않은가?

 

   2. 부자교회

 

  주님은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고 하신다. 그들은 나는 부자다 나는 내 힘으로 부요하여졌다는 것이다. 내 노력 내 수고로 잘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이다.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도 나는 이 미 꽉 차 있으니 제발 다른 말씀마십시오 하고 있는 것이다.

 

   라이디게아는 금이 많은 지역이었고, 직물로 유명하였다. 안약이 유명한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부유한 지역이었다. 이들은 외부적인 부를 근거해서 그들의 신앙을 이쯤이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얼마나 부요했던지 주후60-61년 큰 지진이 나도 로마정부의 도움없이 자체의 힘으로 복구했다. 교회는 풍요로운 사회속의 교회로 부에 대한 프라이드를 교회에 까지 옮겨왔던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은총으로 이렇게 되었다’가 아니라 ‘우리가 잘나서 이렇게 잘산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3. 시체를 감싼 수의

 

   하지만, 그들의 물질적 부는 사실 썩어가는 시체를 감싸고 있는 수의 였다. 주님의 진단을 보라 3:17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것이라고 하신다. 이참혹한 모습은 세 종류로 나타난다. 그들은 가난했고 벌거벗었고 눈이 멀었다는 것으로 평가했다. 그들은 돈이 많았지만 가난했고, 직물업이 발달해서 옷을 입은 것 같지만 사실은 벌거벗었다. 그리고 안약이 발달했지만 눈이 멀었다.


   4. 주님의 대책

 

   주님은 이렇게 평가하신후 아주 놀라운 말씀을 하셨다. 19절 ‘무릇 내가 사랑하는자’라고 말씀하신다. 어떻게 그런 교회를 주님은 사랑하시는가? 하지만 17절과 같은 말씀을 주신것도 16절의 ‘토하여 내치리라’는 말씀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신 말씀이다. 사랑하는 자이기에 책망하여 징계하는 것이다.

   이제 18절에 주님은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하라’고 말씀하신다. 바로 다른 곳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그것을 사라는 것이다.

   불로연단한 것은 불순물이 제거된 금을 말한다. 벧전1:7의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한 금조다 더 귀하여’라고 말씀함과 같이 순수한 믿음을 말하고 있다.

   흰옷을 사서 입어라는 것은 직물업으로 유명한 라오디게아에 직조공장의 옷으로 만족하지 말고 세상의 죄악으로 때묻지 않은 윤리적 생활인 흰 옷을 입으라는 것이다. (약1:27)

   안약을 바르라는 것은 그들이 자기도시의 안과대학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지만, 자신들이 처한 처절한 영적상황을 보는 눈이 없었기에 영적인 눈을 밝히라는 것이다.

   주님은 이 세가지를 사라고 하시되 ‘내게서’사라고 하신다. ‘아메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니의 창조의 근본이신’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문제의 해결자가 되신다는 것이다.


※ 정곡을 콱 찌르며

 

   3;20에 주님은 새롭게 말씀하신다. 우리는 안 믿는 사람에게 이것을 자주 인용하는데 그들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뜻뜻 미지근한 사람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주님이 장사꾼이 되신것이다. 금을 사라고 해도 사지 않고 옷도 사지 않았다. 캄캄한 밤이 되었다. 그래서 문 앞에까지 가서 문을 두드리면서 지금이라도 열어라고 부탁한다. “내가 들어가기만 하면 문제가 다 해결되는데, 빨리 문을 열어주시오”

   그런데 문제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주님을 밖에 두었다는 것이다. 문맥을 보면 주님은 문 밖에 계신다. 우리는 이 주님게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지금 우리의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의 음성을 무시할 것인지 회개하는 마음으로 열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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