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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하지 말라 계1:9-2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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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하지 말라 계1:9-20

시애틀항해일지 2008. 11. 27. 06:23

 

 

제목 :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 서 론

 

  우리의 가장 간절한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찬양처럼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랴 얼마나 좋으라” 우리 주님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볼 수 있고 우리 주님의 음성을 한 번 이라도 들을 수 만 있다면, 그 만큼 감격스럽고, 믿음을 견고히 세우는 일이 없을 것이다.

 

  구약시대 모세도 하나님앞에서 기도하기를 “원컨데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33:18)에 기도한다. 그 때 하나님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33:19-23)

  “주의 영광을 당신의 형상을 보이소서” 우리는 이런 기도를 드린 적이 있는가? 매일 내 삶의 일용할 양식과 병낫기와 내 하는 일이 잘 풀리기를 구하는 이방인이 간구하는 기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원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한 부흥의 역사를 경험할 것이다. 단지 교인수가 많아지고 교회가 커지는 것은 양적 성장이지 진정한 부흥은 아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찬양하게 된다면 그것이 진짜 부흥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체험되지 않고 임재가 없는 교회에 사람만 많으면 그것이 무슨 부흥이겠는가?

 

  어떤이는 그 간구가 지나쳐서 도마처럼 오직 기도원에 가서 하나님 음성 한 번만 하나님 모습 한 번만 보면 당신을 믿겠다고 떼쓰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이러한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자들은 복되도다”하셨다.

  우리는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40일 금식하지 않고 목숨걸면서 떼쓰지 않아도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다. 바로 성령으로 영감된 성경이 주님의 음성을 들려주고 그 분의 모습을 보여준다. 성경을 제쳐두고 주님의 모습을 보기를 원하는 자는 잘못된 사단의 장난에 속아 넘어가고 이단의 길을 갈 수 밖에 없다.

 

※ 성경과 씨름하며

 

 요한은 너무도 명확하게 주님의 음성과 주님의 모습에 직면하게 된다. 얼마나 그 모습에 압도되었던지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다(1:17). 그는 그가 본 주님의 영광과 그 분의 메세지를 1세기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뿐 아니라 지금 여기의 우리들에게도 생생하게 전해준다.

 

1:9-11 요한이 처했던 상황

 

① 환란당하여 밧모섬으로 온 요한

 

  그가 이러한 계시를 받게 된 것은 주의 날에 밧모라는 섬에서였다. 그가 이곳에 있게된 이유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이다. 요한은 바로 예수를 증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다가 밧모섬에 유배되었다. 황제숭배를 강요하는 로마의 도미티안 황제때에 그는 예수를 주라고 칭함으로 로마정부의 핍박을 받게 된 것이다. 요한은 자신을 예수의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소개한다. ‘환란’이라는 단어와 함께 ‘나라’와 ‘참음’을 말했음에 주의해야 한다.

  대분분의 사람들은 “나라”가 도미티안 황제에게 속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로마를 통치하는 황제였고 그가 다스리는 나라에서 요한의 서신을 받는 7교회 성도들은 별로 중요한 존재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요한은 그의 독자들에게 그들은 환란에 동참할 뿐만 아니라 “나라”에도 동참한다고 했다. 1:6절에 그리스도께서 믿는자를 나라로 삼으셨다는 것을 기억한다.

  이 나라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로 현존하는 것이지만, 환날과 고난을 당하는 상황에서 숨기워져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로 이 땅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이 되신 하나님이 진정한 주인이고 우리는 그 나라의 백성인 것이다.

  우리의 고난은 무엇으로 부터 오는가? 나자신의 실수나 잘못이나 어리석음 때문인가? 우리에게 예수의 복음을 인한 환란은 무엇인가? 믿지 않는 사회에서 당하는 신앙때문에 당하는 환란이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요한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는것이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딤후3:12)에 바울은 기록한다. 요한은 극한 고난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이다. 야곱이 외로운 벌판에서 하늘의 사닥다리를 보고 모세가 40년의 광야에서 양치기 노릇을 하다가 타지 않는 떨기나무에 임한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처럼 그는 유배된 밧모섬에서 주님을 보았다.

 

② 예배가운데 뵈옵는 예수그리스도

 

  10절에 그는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였다고 말한다. 그는 이제 주의 계시를 보게된 것이다. 이런일이 “주의 날” 곧 일주일 중 첫째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교회가 함께 모여 성찬을 떼던 날에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요한의 환상은 그의 예배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는 사랑하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밧모섬으로 유배되었지만, 현재 당하고 있는 “환란”을 넘어서 하나님의 나라와 예배를 보는 것이다. 우리의 예배속에서 주일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가장 소중한 기회임을 잊지 말자. 예배없이 하나의 표적을 구하듯이 하나님을 시험하듯 하나님의 보게 달라든지, 예배를 하나의 의무로 드리든지, 성경을 하나의 지식충족으로 여긴다면, 주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없다. 신령과 진정으로 그 분을 예배할 때 요한 처럼 홀로 처하여도 주의 날을 지키어 예배하고자 할 때에 성삼위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것이다.

  요한이 예배하는 그 곳에 이제 나팔소리같은 큰 음성이 들려온다. 그것은 사람의 음성인가? 천사의 음성인가? 그것은 주님의 음성이었다. 너 보는 것을 책에써서 에베소, 서머나.... 7교회에 보내라는 명확한 음성이다. 그가 음성이 들리는 곳으로 몸을 돌이켜 내게 나팔소리처럼 크게 들려진 음성이 무엇인가 확인하고자 할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게 된다.

 

  1:12-20 요한이 본 그리스도의 모습과 메세지

 

  큰 음성에 몸을 돌이킨 요한에게 지중해의 섬은 사라지고 휘황찬란한 다른 장면이 나타난다. 7개의 금 촛대들이 원을 그리고 빛나고 서 있는 것이다. 7개의 금촛대들은 1:20에 보면 일곱교회이다. 이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거니시는데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 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았다. 이 분에 대한 묘사는 너무 장엄하다. 요한은 그것을 볼 때에 그 발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다.

  발에 끌리는 옷이나 가슴의 금띠는 대제사장의 전통적 복장이나 매우 신분이 높은 분의 복장이다. 그 분의 양털같고 눈같이 흰머리와 불꽃 같은 눈은 그 분이 태초 이전부터 계신 분이며, 영원한 능력과 권위를 가지셨다는 것을 말한다. 그 분의 발은 발은 빛난 주석같고, 그분의 목소리는 많은 물소리와 같다. 에스겔서에서는 많은 물소리를 하나님의 음성에 비교했다.

  그 분의 오른손에 일곱별을 쥐고 계셨는데, 이것은 일곱교회의 사자 (1:20)이다. 이 사자가 누군지는 확실히 밞혀지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그 분이 지금도 일곱교회를 붙드시고, 그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는 사실이다. 그 분의 입에서 나오는 “좌우에 날선 검”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 이 말씀만으로 다른 무기가 필요없이 충분하신 것이다. 그 분의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같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르키며, 이것을 보고 살아 남을 자는 아무도 없다(출33:20)

 

※ 정곡을 콱 찌르며

 

  그런데, 이 분을 뵌 요한은 바로 꼬꾸라져 버렸다. 그런데 이 영광스런 분은 다른 분이 아니라 바로 영광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였다. 그 분은 허리를 구부려 오른 손을 얹고서 요한에게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주님은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내가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다”고 말씀하신다. 이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시다. 그러나, 이 영광스러우신 그리스도게서 한 낱 티끌같은 인생인 요한에게 허리를 굽혀 손을 대시며 “두려워 말라”고 선언하신다. 그 분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분이다. 그리스도께서 너와 함께 하시므로 네가 두려워할 일은 진정 아무것도 없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 하는가? 우리에게 가장 크게 보이고 내가 감당치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오늘아침 영광중에 나타나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자. 이사야가 들었던 말씀인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사41:10) 를 기억하자. 부활의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사 우리로 세상가운데 두려움이 없이 세상이 감당치 못할 자로 살도록 선언하고 계신다.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뵈올 때 세상을 넉넉히 이길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김광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