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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2:1-11 에베소교회 서머나교회

시애틀항해일지 2008. 11. 27. 06:38

 

 

제목 :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본문 : 계2:1-11

 

※ 서 론

 

여러분 무더운 여름 잘 보내고 계십니까?

저는 여름 휴가때에 한 가지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는데, 본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를 방문하고 예배할 기회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올해는 섬에 있는 교회에 가서 주일 낮 예배와 저녁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가 있고, 찬송과 기도가 울려나는 것을 보며 역시 우리 주님이 모든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주인 되심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예배하는 큰 교회든, 소수의 사람이 모인 작은 교회든, 도시교회든 농어촌 교회든, 중국의 지하교회든 우리 주님이 모든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계시록은 바로 그것을 보여줍니다.

자신이 죽으심으로 사망을 정복하시고 자기 백성을 죄와 사망에서 해방하신 주님은 초대교회 7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그분은 일곱 교회의 지도자들을 장중에 붙잡으시고 일곱 교회 가운데 거니시는 왕 중의 왕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요한은 비록 밧모섬에 유배되어 함께 예배할 사람들없이 홀로 주의 날에 예배했지만, 바로 그곳에서 교회의 주인되신 영광스런 주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만왕의 왕 그리스도의 태양같은 위엄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7교회중 제일 먼저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한다”고 했을 때, 가슴이 덜컹했을 것이다.

이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여 복음화의 전진기지로 삼았던 곳이며(행 19:1-10), 후에 사도요한과 예수님의 어머니가 정착했던 곳입니다.

에베소 이곳은 요한 자신이 목회하던 곳이고, 자신이 그 교회의 ‘사자’였기 때문이다.

 

① 에베소 교회

 

우리는 흔히 “에베소 교회”하면 ‘첫사랑을 버린 교회, 그래서 촛대를 옮긴 형편없는 교회’라는 식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가 정말 형편없는 교회였는가? 2-3절에 주님의 평가를 보라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다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1) 행위와 교리가 있는 교회

 

에베소교회는 행위가 있는 교회였다.

단지 그저 하는 척 하는 적당한 수준의 행위가 아니라 그것은 ‘수고’의 차원이었다. 적당주의로 대충대충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게으르지 않고 땀을 흘리는’ 실천이었다.

언덕위로 구루마를 올릴 때, 입으로, 손가락으로 , 두손으로 미는 정도가 아니라 온 몸으로 미는 행위였다.

이러한 행위가 한두번 해보다 그만 두는 것이 아니라 ‘인내’가 있었다. 시작만 거창하게 해 놓고 끝이 흐지부지 되는 식이 아니었다.

어쩌다가 기분 내키면 열을 오려 해보다가 기분 나쁘면 그만두는 실천이 아니었다.

3절의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라는 구절을 유심히 보라.

이러한 인내의 동기 또한 ‘자신의 이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위한’ 선한 동기 인간의 야망이 아닌 주님의 영광에서 이루어진 인내였다.

2절의 내용처럼 악한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이단을 시험하여 폭로하고 바른 교훈을 지키는 그런 교회였다.

행위가 완전하고 교리에 온전한 이런 모범적인 교회가 한국에 몇개나 있겠는가?

교리는 강조하는 교회는 입과 머리는 강하고 손발은 마비되거나 허약한 반면, 행위를 강조하는 교회는 대개 손발이 튼튼하지만 머리는 성경보다 인본주의로 가득차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는 교리와 행위에 있어 주님의 칭찬을 받은 교회였다.

 

2) 첫사랑을 버린교회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우리는 요한1.2.3서 서신을 통해 ‘사랑의 사도’ 요한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요한이 목회한 교회, 에베소 교회에 ‘처음사랑’이 없다고 하시니 그 말씀이 요한에게는 얼마나 큰 충격이었겠는가?

그러면, 처음사랑을 버렸다는 것은 무엇인가?

주님은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행위를 가지라’. 에베소교회의 처음모습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바울사도가 에베소 두란노 서원에서 매일 성경강좌를 열어 교회가 일구어지는 데 그 때 어떤 사본에 보면 매일 11시에서 4시까지 성경강좌를 열었다고 한다. 에베소 교회는 영적 식욕이 왕성했고, 매일 몇 시간씩 말씀을 경청하는 열정이 있었다.

또한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가 인간들 서로간의 깊은 관계로 나타나서, 인정이 넘치는 교회였다. 사도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놓고, 유언설교를 한 다음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했다고 행20:17-35에 기록한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 40년이 지나 요한이 계시록을 집필할 당시 에베소 교회는 첫사랑 첫 행위를 잃어버렸다.

우리 나라 초대교회도 에베소 초기 교회 사경회와 같았다. 그 때의 교인들은 쌀자루를 짊어지고 강원도에서 서울까지 며칠간을 걸어와서 사역회에 참석했다고 한다.

가져온 쌀로 밥을 해 먹어 가면서 말씀을 경청했다고 한다.

중국지하교회의 이야기를 들으면 1시간 설교한 목사님에 대한 항의가 빗발친다고 합니다. 몇일을 걸어오거나, 멀리서 기차를 타고와서 드리는 예배에 겨우 1시간 말씀밖에 증거하지 않다니 그들은 분통을 터뜨린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주일 예배 설교가 30분만 넘어도 속이 뒤틀리고 또 시계만 묵상하고 앉아있는 현실 아닙니까?

말씀을 너무 많이 들어서 식상해 있다.

우리의 기도는 어떤가? 하나님께 문안드리고 ‘오늘도 무사히!’ 정도의 대충때우기는 아닌가?

인간관계는 어떤가? 교인들 안에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으로 관계들로 상처주고 상처받는 면은 없는가?

에베소 교회는 고난을 감내하는 실천과 이단을 증오한고 지적하는 교리를 지키는 교회였지만, 주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사람들에 대한 끊는 열정은 없었다.

우리는 이 더운 여름날에도 더위와 상관없이 손을 꼭잡고 다니는 연인들을 봅니다. 하지만, 결혼 한 10년쯤 지난 부부는 덥다며 서를 떨어지라고 합니다.

익숙해 지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첫 마음 첫 사랑만은 변해서 안됩니다.

우리 주님이 오늘 우리를 향해 주시는 말씀도 동일합니다.

‘첫사랑을 회복하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② 서머나 교회

 

우리는 에베소 교회와 대비되는 또 한 교회를 보게된다. 그 교회는 다름아닌 서머나 교회이다.

우리 주님은 서머나 교회에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로 자신을 소개하셨다.

서머나는 전쟁의 폐허에서 재건한 도시이다. 당시 리디아 군대가 서머나를 공격해 파괴되었지만, 그 위치가 중요하여 다시 재건되었다.

그래서 그 도시를 때때로 “죽었다가 산 도시”로 불렀다. 그 지역에 서머나 교회가 있었고 고난과 궁핍과 핍박이 있었다.

그러기에 서머나 도시가 죽었다가 다시 산 것처럼 사망을 체험하고 이기신 주님이 교회의 주권자심을 드러낸 것이다.

 

1) 실상은 부요한 교회

 

주님은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안다”고 하셨다.

서머나 시는 본래 무역이 번창하여 잘 사는 도시인데, 그 도시의 신자들은 어째서 궁핍했는가? 가난한 부류의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성경에 적힌대로 그들의 궁핍의 이유는 환란 때문이었다.

그 환란은 어떤 환란인가?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서머나 교회 환란은 유대인 회당으로 부터 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사단의 선동을 받아 “기독교는 로마국교를 적대시 하는 로마의 역적”이라고 참소했을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서머나 교회신자들은 재산도 빼앗기는 고통을 당했을 것이다. ‘너희가 갇힌 다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원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히10:34)는 말씀처럼 산업도 빼앗겼다.

서머나 교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궁핍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예수님의 이름과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환난을 당했고 그 결과 궁핍하게 되었다.

서머나 교회는 경제적으로 궁핍한 교회였지만, 주님의 눈에는 “실상은 부요했다.” 사람의 판단과 주님의 판단은 다른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3:17)에 평가한다.

부자라도 어리석은 부자처럼 하나님에 대해 부요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자가 있는가 하면, 가난해도 주님보실 때에 실상은 부요한 자도 있다.

우리는 주님의 눈에 어떻게 비취겠는가?

 

2)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교회

 

이미 현재적으로 고난당하는 서머나 교회에게 주님은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마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지상에서도 제자들에게 ‘세상에서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요16:33)에 말씀하셨다. 주님을 따르는 자 중 몇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주님을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아야’ 한다.

주님은 서머나 교회에게 미래의 고난을 예고하시되 구체적으로 지적하신다.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동안 환난을 받으리라’고 하셨다.

뒤에 나오는 ‘죽도록 충성하라’는 명령과 연결해 보면, 여기서 ‘옥’은 처형당하기전의 심각한 고통을 상징하는 것일 것이다. 10일 동안의 환란은 다음날에는 석방을 전제하는 것이니 환난을 당할 때는 끝이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잠시동안의 환란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벧전 1:6-7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하려 함이라’

주님은 서머나 교회에 ‘장차 당할 환난을 두려워말라’고 하신다. 고난을 앞두고 두려워하는 것이 인지상정임에도 주님은 두려워 말라하신다.

바로 주님 자신이 죽었다가 고난의 절정인 죽음에까지 내려가셨다가 살아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

우리는 서머나교회가 당한 것과 같은 환란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은 무엇을 우리에게 말해주는가?

죽도록 충성하는 것을 대단한 어떤 것으로 보기 전에 일상 생활속에서 주님에 대한 신의를 지키는 것으로 생각해보자.

가정에서 가족들의 밥상을 차리면서, 병목현상이 일어나는 교통지역을 통과하면서, 볼일을 위해 은행이나 상점등을 오가면서 내가 신앙의 지조를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교회에서 맡은 작은 일들속에서, 성도들과 이웃들과의 대화속에서 주님께 충성되고 있는지 점검헤 보자.

주님은 서머나 교회에 ‘죽도로 충성하라’고 하시고,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약속하셨다.(2:10)

 

서머나 시는 파고스 언덕을 중심으로 장엄한 공공건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밑으로 도시가 형성되어있다.

그래서 서머나 항구를 통해 들어오는 자들의 눈에는 그 모습이 마치 건축물의 면류관처럼보였다.

그래서 이 면류관은 서머나 교인들에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주님은 그들에게 익숙한 비유를 통해 충성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상급이 주어질 것이라는 것을 약속하고 있다. 여기서 생명의 면류관은 구원의 개념이 아니라 보상의 개념이다. 충성하는 자는 그렇지 않은 신자보다 더 큰 상급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십자가가 큰 만큼 면류관도 큰 것이다.

작은 것에 충성된자에게 큰 것으로 맡기며, 남의 것에 충성한 자에게 자기의 것을 맡기시는 분이 주님입니다.

ex) 10므나의 비유

 

주님은 또한,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으리라 하셨다.

사람의 육신의 죽음이 첫째 사망이라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가는 것이 둘째사망이다.(21:8)

고난앞에 굴하지 않고 주님에 대한 신의를 지키으로 이기는 자는 절대로 둘째 사망의 해를 당하지 않는다.

 

▶ POINT

주님의 눈 앞에서 풍요한 자가 되기 위해 귀 있는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도록 하자.

 

고전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Pastor Kwangyoung 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