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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넴여인과 엘리사 <김광영목사>

시애틀항해일지 2011. 3. 3. 06:28

 

 

 

 

 

 

 

별은 어둠속에서 가장 빛난다.

그대, 빛 가운데서 절망하는 사람인가?

어둠 속에서 꿈을 꾸는 사람인가?

 

 

왕하 4:17~25

하나님을 향한 달음박질

 

Wed, 2nd Mar 11

 

 

김광영목사

 

 

첫번째이야기

 

 

⌗ Bible 성경말씀

 

오늘 성경본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여인이 과연 잉태하여 한해가 지나 아들을 낳았다.’

 

이 여인은 누구이며 이 아이는 어떤 아들인가?

전문맥을 살펴보면

수넴의 한 귀한 여인이다. 이 여인은 엘리사를 강권하여 음식을 먹게하고, 남편을 청해 엘리사를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으로 확신시킨다. 그를 선지자를 위한 작은 방을 담위에 짓고 침상과 책상 의자 촛대를 진설케 한 뒤 거기 유하도록한다.

 

여인의 배려에 엘리사는 ‘네가 이같이 우리를 위하여 생각이 주밀하도다 세심하게 배려한다’며 칭찬한다.

또한,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왕에게나 군대장관에게 무슨 구할 것이 있느냐고 그의 시종 게하시를 통해 묻게된다.

게하시는 ‘참으로 이 여인은 아들이 없고 그 남편이 늙었나이다’고 답한다.

16절에 보면 이 여인을 불러 선지자가 ‘한 해가 지나 이 때쯤에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 선언했다.

 

1. 아들을 얻음과 죽음 (17~20)

 

이렇게 얻은 귀한 아들이다. 그런데, 이 아기가 자라나 하루는 추수꾼들에게 나아갔는데, 아버지가 이르렀을때 ‘내 머리야 내 머리야’하였는데, 어머니께 데려갔더니 낮까지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있다가 죽었다.

통상 일사병으로 추정되고, 뇌출혈이나 뇌말라리라로부터 뇌막염까지 유추되지만 어쨌던 두통으로 죽음에 이르렀다.

추수가 한창이던 어느날 심한 두통을 호소하는 아들이 어미의 무릎에서 죽은 것이다. 추수의 기쁨이 아들의 죽음 앞에서 무슨 소용이겠는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얻은 생명이 죽다니? 우리에게 의문이 든다. 하나님이 주셨는데 죽을 수 있는가? 왜 하나님은 죽을 아들을 주셨는가? 참으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이다.

 

이 사건과 유사한 구약의 사건은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모래같이 너의 자손을 많게하리라’ 약속하시고, 모리아산에서 그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본다. 네 몸에서 날 자 곧 이삭을 통해서 그 일을 이루리라고 하실때는 언제고 지금 그 아들을 달라하시는가?

아브라함에게는 얼마나 많은 고민의 시간이 있었겠는가? ‘하나님 약속이 틀리지 않습니까?’ 그렇게 항변할 만도 하지 않겠는가?

 

우리 삶에도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 기도로 낳은 병이 다시 재발할 수 있는가? 기도로 일군 사업이 사망할 수 있는가? 기도로 키운 자식이 빗나갈 수 있는가?

 

2. 아들의 죽음을 본 아비와 어미의 대화 (21~23)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여인의 반응을 본다. 그녀가 슬퍼하거나 통곡하지 않는다.

아들을 하나님의 사람의 침상 위에 두고 문을 닫고 나와 그 남편을 불러

‘사환 한명과 나귀 한 마리를 내게로 보내면 내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갔다 오겠다는 것이다’

 

남편의 반응은

초하루도 안식일도 아닌데 오늘 어찌 그에게 나아가고자 하느냐 질문한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자신들이 음력을 사용한 것에 맟추어 ‘초승달’이 뜨는 때인 매달 초하루를 절기로 정해, 이 때는 안식일에 하듯이 모든 일을 쉬고 제사를 드렸다. 이 때는 백성들이 신탁을 구하기 위해 선견자를 찾아가기 좋은 시기였던 것이다.

 

여인은 때를 가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아들이 죽었기 때문에 당장에 하나님의 사람에게 갔다 오겠다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그것이 아닌가? 정말 급하고 답답하기에 목마른 사람이 우물판다고 주일 예배시간을 기다려 기도할 수 없는 것이다. 고통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기도하고 하나님을 구하고 찾는 것이다.

아니, 오늘은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요. 기도할 때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때에 그를 부르라.’

우리의 수요기도회가 그야말로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가장 적기는 아닐까? 이왕 기도하러 왔다면 그런 기도의 시간이 되도록 하자.

 

3. 갈멜산의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감 (24~25)

 

이에 나귀에 안장을 지워 사환과 함께 갈멜산으로 가서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간다.

 

우리는 여기서 여인의 믿음을 읽을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을 찾음으로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다.

아브라함도 하나님께 얻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고자 모리산에 올랐을 때 어떤 믿음을 가졌을까?

히 12:17-19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이 여인의 믿음은 가히 아브라함의 믿음에 비견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람이 기도의 응답으로 주신 아들이라면, 죽은 아들도 다시 살리시리라 믿는 믿음이 아니면, 갈멜산으로 그렇게 갈 수 있었겠는가?

 

⌗ Be live 삶의 적용

 

우리는 문제가 생길 때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어디로 달려 가는가? 수넴여인은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갔다. 그의 행동에 지체가 없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후문맥을 보면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아이 위에 올라 자기 입을 아이이베, 자기 눈을 그의 눈에, 자기 손을 그의 손에 대고 그의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여지고(34절) 일곱 번 재채기하고 눈을 떠서 살아나게 되었다.

믿음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은 것이다. 우리가 과연 믿음으로 기도한다면 주님께서 그 간구를 들으실 것이다.

 

 

 

 

두 번째이야기

 

우리는 이와 유사하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를 신약 속에서 또 접한다.

예수님께서 나인의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는 장면이다.

 

눅 7:11-17

 

한 무리가 나인성으로 가고 있다. 이들은 얼마전 백부장의 종이 죽어가는 것을 말씀으로만 살리신 예수의 능력을 맛보고 또 그전에 산상설교를 통해 예수님의 능력의 말씀에 들뜬 무리들이다. 예수님이 그 무리의 중심에 계시고 제자들이 보디가드하고 허다한 무리가 그를 따른다. 이제 이 무리는 성문 가까이까지 왔다.

또 한무리가 있다. 그들은 성문에서 나오고 있다. 그 무리속에서 한 여인은 울고 있고, 곡소기가 있다. 그 성의 사람들이 이 불쌍한 과부의 슬픔에 동참하며 과부의 독자를 장사지내기 위해 나오고 있다.

 

예수께서 이 행렬 속에서 관심을 가지신 것은 무엇이었나? 바쁘게 도착해야할 나인성이었는가? 아니면, 비켜가야할 것같은 장례행렬이었나?

아니면, 불쌍히 관에 누운 청년이었는가? 예수님의 눈빛은 과부에게 머물고 계신다. 그를 보시며 불쌍히 여기신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산상수훈에 나타나있다. 바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6:20-21) 주님은 바로 울고있는 과부의 주리고 가난한 영혼을 보시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서신 것이다. 그리고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울지말라”고 하신다.

 

2. 과부를 불쌍히 여기사 아들을 살리심

 

장례식에 가서 울고 있는 사람에게 “울지말라”는 말이 무슨 위로가 되겠는가? 대학시험에 낙방한 학생에게 “울지마”라고 말하면, 그 친구가 뭐라고 대답할까?

“니는 시험잘 쳤으니까 그렇지 니가 떨어졌으면 안울겠나?”라고 말할 것이다.

하물며 과부 -- 이 과부는 이스라엘나라에서 고아와 같은 취급을 받는 불쌍한 사람이었다 -- 남편은 먼저 보내고 더구나 자신의 유일한 희망인 독자 아들 한명 보고 살아왔는데 졸지에 자기보다 앞서 보낸 것이다. 이 과부에게 “울지말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위로가 될 것인가?

 

만일,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여기서 끝난다면, 우리는 예수 믿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불교에서도 이 정도는 한다. 어느 마을에 아들이 죽은 과부가 석가모니를 찾아와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했단다. 석가모니는 온 마을을 돌아다니며 한 번의 장례도 치루지 않은 집을 찾아 그 집의 쌀을 시주해 오도록 했다. 하지만, 그런 집은 한군데도 없었다. 석가모니는 죽음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니 그저 받아들이라고 말한 것이다.

 

석가도 여인에 대한 불쌍히 여김은 가졌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그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문의 예수님은 관에 가까이 오사 손을 대신다.

율법에서는 죽은 자의 관에 손이 닿으면 부정한 것으로 간주했다. 유대인들의 관습에 시체는 세마포로 싸고 얼굴은 손수건으로 덮어서 뚜껑이 없는 관에 넣었다고 유대역사가 요세푸스는 전한다. 예수님이 이 관에 손을 대신 것은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의 관습을 깨뜨린 것이었다. 하지만, 과부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은 율법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그 긍휼하심으로 시체가 든 관에 손을 댄 것이다.

 

3. 큰 선지자 예수의 소문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 사건을 행하신후 16절에 큰 선지자가 우리가운데 일어나셨다고 하는데, 그들이 말한 큰 선지자는 누구일까? 혹시 아는 사람..?

 

그들은 바로 구약의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를 가르킨다. 그들은 여인의 죽은 아이를 살린 기적을 이룬 큰 선지자 였다. 바로 예수님이 이와같은 일을 하셨다는 것이다. 더구나 나인성 가까이에는 엘리사가 여인의 아이를 살린 수넴지방이 가까웠다.

 

하지만,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와 예수님이 비교될 수 있을까?

그것은 너무도 다르다. 왕상 17:12-22을 보면서 엘리사는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림으로 여호와께서 그 선지자의 기도를 들으사 아이를 살리신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호와께 기도하지 않는다. 그는 “청년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일어나라”하신다.

그분은 말씀 한마디 하실 뿐이다. 그런데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가? 죽어 누웠던 청년이 일어난다. 그리고 입을 열어 말도하고 어머니의 품에 안겨진다. 그는 살아난 것이다.

 

☆ point

 

예수님은 도대체 누구시란 말인가?

요11:25-26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신다. 그분은 생명에대해 가르침을 주는 선생이 아니라 그분자신이 생명이신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시므로,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에 오게 되었다.

 

철이 달라붙는 철이 있다면, 바로 자석에 연결된 철일 것이다. 못에 자력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라, 자석의 크고 절대적인 자력을 빌린 것이다. 못도 못을 붙일 수 있다. 하지만, 못이 자석은 아니다. 자석에서 떨어진 못은 평범한 못일 뿐이다. 예수님은 바로 생명의 자석이 되신 것이며, 그 분은 바로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다.

이 사건에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하고,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진다. 우리도 이 생명의 예수님을 전하는 자들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