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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족보 마태복음 1장

시애틀항해일지 2009. 3. 2. 06:26

마태복음 1:1-17

왕의 계보

 

 

 

 

 

 

김광영 목사

 

우리는 신약의 첫 페이지를 열자마자, 마치 산부인과로 들어온 느낌을 받는다.

아브라함은 이삭은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낳고.. 낳고

신약성경의 첫 시작은 사람들의 이름들로 시작된다.

예수그리스도의 나심은 바로 이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또한, 그 구원의 역사도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이 이름들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일하심에 그분은 바로 우리 같은 사람을 사용하는 것이고, 그 역사에 우리를 동참시켜 주는 것이다.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본문에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로 소개된다.

한글 개역개정성경은 아브라함이 먼저 나오지만, 원래 순서는 다윗이 먼저 나온다.

1:1 1:17

예수그리스도-다윗-아브라함 아브라함-다윗-그리스도

아쉽게도 개역성경은 1절의 번역에서 헬라어 본문의 이 순서를 완전히 뒤집어 놓아

이러한 인클루지오 구조를 보여주지 못한다.

1절에서 다윗으로 시작된 이 계보는, 다윗왕의 자손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조명한다.

마태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제시하려는 강한 의도를 보여준다.

마태 계보의 두 전환점들이 다윗 왕조의 시작과 끝인 다윗과 바벨론 포로로 보여주고 있다.

아브라함보다 다윗이 전체적으로 더 강조되는 것을 보게된다.

 

 

2. 14세대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14대씩 3개로 묶어놓은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14는 7의 배수로 유대인에게 특별한 의미였다.

대제사장의 계보도 아론부터 솔로몬의 성전때까지 14대로, 솔로몬 성전부터 구약에서 마지막 언급된 마지막 대제사장 얏두아까지를(느10:21) 14대로 셈한다.

마태는 예수님이 아브라함으로 부터 7대씩 6묶음. 6세대만에 와서 새로운 7주 세대로, 즉 충만한 때를 열고 있음을 보이려 했던 것은 아닐까?

한글과는 달리 히브리어와 헬라어 알파벳은 각 글자가 숫자의 기능도 겸했는데, 단어가 갖는 숫자값을 세어서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관습이 있었다. 어떤 학자는 다윗의 히브리어 이름이 숫자로는 14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렇게 마태가 14대를 단위로 택했다고 보기도 한다.

 

하나님의 우리인생의 시간들이 그저 우연히 쌓여지도록 허용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목적과 뜻가운데 선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이 땅이 역사와 개인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은 왕으로 통치하고 계신다.

 

3. 특별한 사람들

 

 

우리는 아브라함, 다윗 같은 믿음의 영웅들뿐 아니라.

므낫세같은 악한 왕의 대명사로 알려진 그들까지도 예수님 계보에 있음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고대사회에서는 족보에 기록될 수 없었던 여인이 4명이나 기록된다.

이 여인들은 모두 이방인이다.

다말은 가나안 여인(창 38:11), 라합은 여리고 (수2,6장), 룻은 모압(룻 1:4)출신이다. 우리야의 아내는 우리가 헷 사람이었음을 감안 할 때, 헷 여인이든지 최소한 헷 남자의 아내였다(삼하 11-12장)

이들의 특징은 모두 비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하였다는 것이다.

다말은 시아버지와 육체적 관계를 가졌고(창 38장), 라합은 창기였으며(히 11:31), 룻은 재혼을 하였고(룻 4장), 우리야의 아내는 간음과 재혼을 하였다(삼하 11-12장)

왜? 예수님은 탁월하고 좋은 가정, 아니 그렇지 못해도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가정이 아닌 이런 가정의 줄기를 타고 이땅에 오신 것일까?

마태는 그것을 덮어두려 하지 않고, 그대로 솔직히 드러내 주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죄인들을 위해 오신 그리스도를 드러내준다.

하나님은 불완전한 사람들, 실수 많고 죄 많은 사람들을 통해 당신의 일을 이루시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의 모든 사건에서 하나님은 왕으로 통치하고 계심을 믿는가?

우리 인생의 연약함과 죄악들 가운데도 주의 긍휼과 사랑이 있음을 아는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한다고 바울사도는 로마서에서 말했다.

 

이 땅의 종교와 기독교의 차이를 든다면, 바로 죄인의 종교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의와 율법과 도덕으로 하나님의 완전함에 이르라고 말하지 않으신다.

아니, 그것이 불가능함을 아시기에, 그분이 우리 곁으로 찾아오셨다.

스스로 구원할 길이 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 가운데 오실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오시는 계보는 낳고 낳고.. 생명을 주는 계보가 되고 있다.

우리는 죄가 세상에 들어온 후 기록된 창 5:3-32의 죽었더라가 반복되는 계보와 대조되는 것을 본문에서 보게 된다.

예>4-5절 [4]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에서 그가 오신 목적을 알게 된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죄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자로 주님은 오셨고, 이제 생명의 족보가 적혀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

새봄, 죽은 나무가지에 새싹이 돋고 꽃이 피듯, 죄와 허물로 죽은 영혼들을 살리는 새생명축제에 많은 이름들이 '쉰들러 리스트'처럼 생명의 리스트가 되어 생명의 족보에 오르기를 원한다. 우리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그런 귀한 일들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