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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고 (헨리 나우웬)
우리시대의 모습
예전시대를 생각하면, 우리시대는 분주하지 않게 살기가 참으로 힘들다. 어른들뿐 아니라 아이들도 쉬지 못하는 시대이다. 초등학교 1학년에서 2학년 진급하는 아들녀석에게 '한학년 올라 가는 것이 좋으냐?'고 질문하니, '아니요, 더 공부할 것이 많아지쟎아요'라고 말한다. 아이들도 바쁘고, 어른도 바쁘다.
뿐만아니라, 우리시대, 바쁘다는 것이 이미 신분의 상징처럼 되어져 버렸다.
바쁘다는 말과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는 것이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생산지향적인 우리사회에서 바쁘다는 것, 할일이 많다는 것이 자신을 확인하는 중요한 방편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인을 더욱 속박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걱정이다.
이것은 '만약'이라는 것으로 꽉 차있는 것이다.
'만약, 신종플루에 걸리면 어쩌지?' '만약, 직장을 잃으면 어쩌지?' '만약, 쓰나미나 지진이 일어나면 어쩌지?'
이런 것들에 대한 걱정으로 우리는 참된 내적 자유를 얻지 못한다.
오늘 본문 말씀처럼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염려하는 삶속에 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정신이다.
우리사회는 일에 매여 있도록 부추길 뿐 아니라, 이런 걱정과 염려에 사로 잡히도록 부추긴다.
신문, 방송, 인터넷 뉴스들에는 끊임없이 절박한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다.
아나운서의 흥분된 목소리, 끔찍한 사건들, 잔인한 범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온갖 사건들이 우리를 불안으로 몰아 넣는다.
또한, 이런 뉴스들 가운데서도 제일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광고의 홍수이다. 우리가 이 책을 읽지 않고, 이 영화를 보지 않고, 이 말을 듣지 않고, 이 상품을 구입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몰아 부친다. 광고의 무자비한 폭력이다.
세상은 그렇게 수많은 걱정들을 던져주며, 우리 삶을 바쁨으로 채워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이렇게 걱정거리에 시달리고 삶에 지치도록 바쁘면서도 우리는 불만 속에 살아간다는 것이다.
오늘날 걱정한다는 것은 수많은 일들에 매이고 거기에 몰입하고 있지만, 동시에 따분함과 원망과 지독한 고독을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 걱정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그것이 우리의 삶을 조각조각 분열시킨다는 것이다.
바쁘면서도 따분해 한다. 온갖 좋은 상품들이 가득하면서도 우울해 하고, 삶을 주도해 가는 듯 정신없이 살면서 원한에 사무쳐 있다.
따분함이다. 수많은 일에 분주하지만, 왜 그토록 바빠야 하는지 의구심이 생긴다. 열심히 일하지만 마치 자동차 바퀴가 겉도는 듯이 내 삶이 충일함을 느끼지 못하고 따분해한다.
이 따분함이란 원한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이렇게 바쁘지만, 이용당하고 조종당하고 착취당함으로 바쁨을 느끼고 있다. 우리삶이 마치 과업을 이루어내어야 하는 기계처럼 조종당한다고 생각할 때, 분노가 내면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이다.
그러면서 때때로 우울감이 찾아온다. 차라리 내가 존재하지 않으면 더 낫게다는 생각이 침투한다. 우리를 지독한 죄책감으로 몰아간다.
따분함, 원한, 우울 이 모두가 관계의 단절에서 비롯된다.
우리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이다. '정말로 나에게 진실한 마음을 써주는 사람이 과연있는가? 나의 내적 소외감을 제거해줄 사람이 있는가? 내가 함께 있으면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는가?'
무력감을 동반하는 이 격리감이야말로 인간이 겪는 고통의 핵심에 해당한다.
우리는 스스로 소속되어 있는 자리를 알면서도 여전히 집 없는 사람처럼 여기저기 계속해서 끌려다니고 있는 것이다. 마치, 주소를 가지고 있지만, 그 주소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이런 현대사회에서 우리에게 돌파구는 있는가?
걱정에 찬 우리 삶에 대한 주님의 응답은 있다.
주님은 우리 삶을 형성하는 수많은 사건들, 활동들 사람들로 부터 우리를 떠나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것과 단절하고 어디 기도원이나 수도원에 머물라고 하시지 않는다.
도리어 우리에게 무게의 중심점을 이동시키라고 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삶을 '많은 것들'에서 '필요한 한 가지 것'으로 옮겨가기를 원하신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은 마음의 변화이다.
이 중심점은 과연 무엇인가?
오늘 본문이 이것을 말하고 있다. 33절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우리의 삶에 중심점이 바로 그곳에 있다.
아마 예수님처럼 바쁜 분도 세상에 없었을 것이다. 너무나 많은 활동에 매여 혼자 있을 시간조차 내기가 쉽지 않았다. 마가복음 1장 32절 이하를 보라.
예수님의 기도가 끝나기가 무섭게, 시몬의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와 '모두들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합니다.
그 바쁜 삶 중에서 주님은 분명한 한가지의 중심을 잃지 않으셨다.
눅 2:49 예수님이 어린 시절 성전에서 하신 최초의 말씀이다.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그의 마지막 순간인 십자가에서도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 23"46)
주님은 유일한 관심사는 아버지의 뜻이었다.
아버지와의 이러한 순종적 관계가 예수님 삶의 중심축이었다.
우리에게 순종은 권위를 연상하게 한다. 징벌이라는 위협 때문에 마지못해 해야 하는 어렵고 힘든 일, 어린 시절의 불행했던 사건들을 떠올리며 알러지 반응을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예수님께 순종은 그렇지 않다.
주님은 아버지에 대한 순종 안에서 참 평안과 기쁨을 누리셨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요 16:28)
예수님은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하게 될 것이라'(요 14:12)하셨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처럼 되게 하시려고 우리와 같아지신 분이다.
영적생활이라는 것은 우리를 세상에서 떼어 놓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숙히 파고 들도록 만드는 것이다.
요 17: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요 17:15-16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 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이 세상에 있지만, 이 세상 것이 아니다.'는 말이야 말로 영적생활에 대한 예수님의 핵심적인 요약이다.
영적생활을 산다는 것이 우리가 가족을 떠나고 직장을 포기하고 일의 방식을 뜯어 고친다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엄격한 고행을 하거나 장시간 기도를 드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물론, 이런 시도가 영적 생활의 과정에서 필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영적생활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숫자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의 충동들에서 해방되어 단 한가지 필요한 것에다 우리의 마음을 고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수많은 일들, 사람, 사건들을 경험하는 방식이 바뀌는 것이다. 예전에는 걱정거리였지만, 이젠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시고 우리에게 경험케 하시는 통로로 체험하는 것이다.
우리의 갈등과 고통, 직무와 약속, 가족과 친구, 활동과 계획들을 더 이상 우리가 함께 하고 싶지 않는 갖가지 피곤한 일들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새로운 생명을 체험하는 기회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어려운 질문이 생긴다. 걱정이 가득한 삶을 어떻게 성령을 체험하는 길로 옮길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저, 성령이 오셔서 우리의 걱정들을 날려 버리실때까지 수동적으로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우리에게 일상생활은 우리에게 주장하는 것이 너무도 현실적이며, 직접적이며, 절박해서 성령안에서의 생활이란 소원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극단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한결같이 걱정만 하는 삶을 사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성령에 몰입해서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여러가지 걱정속에서도 성령의 현존이 섬광처럼 번뜩이기도 하고, 우리의 자아속에서 성령의 생명을 체험하는 때조차 걱정들이 솟구치기도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단 한가지의 중심으로 옮겨가는 성령의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영적생활은 선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우리에게 수동적으로 있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구한다는 것은 절실하게 열망할 뿐아니라 강력한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나를 따르려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마 16:24)고 하신다.
우리는 영적인 결단을 함으로 삶의 전환점을 맞이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너무 지나친 내적소음들, 혹은 외적 소음들에 둘러싸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그 음성을 온전히 알아듣기 힘들다.
우리는 귀머거리가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는지, 어느 방향에서 부르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먼저,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은 '온통 귀로 사신 분'이었다. 항상 아버지의 음성에 예민하고 예의주시했다.
우리에게도 주님의 나라를 먼저 마음에 두기 위해 2가지가 필요하다.
1. 고독
우리는 관심을 온통 그분에게 쏟기 위한 시간과 공간을 할애해야 한다.
(마 6:6)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우리의 삶속에 일정한 고독의 시간을 수용한다는 것은 가장 필요하지만, 가장 힘들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결단이 있어야 한다.
하루에 그 시간을 확보하고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때로 그것이 우리가 그저 시간을 낭비하는 기분을 느끼게 할 수도 있다.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수천가지 생각과 느낌들에 집중포화를 당하는 시간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고독에서 도망치기 위해 망상에 잠기거나, 그저 잠들어 버릴 유혹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 가운데서 주님과의 만남을 위한 적극적인 고독의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성경을 펴서 짧은 시편이나 복음서의 구절을 읽거나 암송하면서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개인묵상의 시간이다.
우리는 이런 고독의 시간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말씀가운데 고요히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실, 많은 목소리들이 우리의 주위를 끈다. “네가 좋은 사람인 것을 증명하라”는 목소리가 있다. 다른 목소리는 말한다. “너는 너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편이 낫다.” 그 목소리는 또말한다. “아무도 너에게 진정한 관심을 갖지 않는다.” 하나는 말하길, “성공적이고 유명해지고 힘 있어야 사람들이 너를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것의 저변에 자주 대단히 잡음 같은 음성 여전히 고요하고 작은 음성이 말한다. “너는 사랑받는 존재이고 나의 호의가 네 안에 쉬고 있다.” 그 음성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들을 수 있는 필요한 음성이다. 그 음성을 듣고자함에는, 그렇지만 특별한 노력이 요구된다. 이것은 고독과 침묵과 강한 듣고자 하는 결심이 요구된다.
고독한 시간의 묵상과 기도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에게 “내 사랑하는 자요”라고 말씀하시는 그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2. 공동체
공동체는 우리를 불러 모으시는 하나님 안에 토대를 두는 것이지, 사람들이 서로에게 주는 매력에 토대를 두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우리는 그 몸의 각지체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이 공동체 안에서 서로 들어주어야 한다. 또한 말씀을 함께 귀담아 들어야 한다. 또 다른 경쟁의 장소로서 긴장감을 더하는 자리가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동일하게 사랑하시는 자녀요,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로 우리는 한공동체로서의 성도와 만나야 한다.
우리의 다락방 소그룹이나 제자반 모임 등이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타인을 두려움에서 매어달리는 대상으로가 아니라 더불어 하나님을 위한 새 공간을 창조해 가는 성도로 만나야 한다.
결론
우리는 고독을 통해 우리의 내밀한 자아속에서 하나님을 위한 공간을 발견한다. 공동체의 진정한 교제와 사랑을 통해 함께하는 삶속에서 하나님을 위한 공간을 발견한다.
우리의 걱정과 경쟁으로 분열된 삶의 틈바구니 속에서 성령안에서 하나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대단한 영적전쟁이 요구된다. 세상의 목소리가 아니라 성령의 목소리가 우리속에서 강하게 들려지도록, 세상의 가치관이 아니라 성경의 가치관으로 이 땅을 바라보도록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과의 고독한 시간으로 나가야 한다. 또한, 믿음의 공동체의 모임으로 나가야 한다.
이렇게 먼저,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잠겨질 때 세상을 향해 나가가 세상에 있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 김광영 목사 편집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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