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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영의 시대보기

한국기독교목회지원네트워크 : 크리스챤아카데미_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_나를 따르라

시애틀항해일지 2020. 9. 3. 16:51

'나를 따르라' 역본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그는 나치에 대항하며, 수용소에 갇힌 이후 옥중서간에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시를 남겼다. 본회퍼는 194345일 테겔 형무소에서 옥중서신을 남겼고, 19454월 플로센뷔르크수용소에 이감되어, 49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젊은 나이에 주님곁으로 간 그의 삶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떤 공명이 되어질까?

 

 

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내가 성에서 나오는 영주와 같이

침착하고, 활기차고, 단호하게 감방에서

나온다고 종종 말한다.

 

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마치 내가 명령하는 것 같이

간수들에게 자유롭고, 다정하고, 분명하게

이야기 한다고 종종 말한다.

 

나는 누구인가?

그들은 내가 승리에 익숙한 사람처럼

한결같이, 웃으며, 자랑스럽게 불행의 나날들을

견뎌낸다고 종종 말한다.

 

그렇다면, 남들이 말하는 것 모두가 정말 나인가?

아니면, 나 스스로 아는 내가 단지 나인가?

새장의 새와 같이 불안하고, 그리워하고, 병들고,

마치 손이 목을 조르는 것과 같이, 숨 쉬려고 버둥거리고,

 

빛깔과 꽃과 새소리를 동경하고,

따스한 말과 이웃사랑을 목말라 하고,

위대한 일에 대한 기대로 뒤척이고,

 

멀리 있는 친구의 걱정으로 무력하게 가슴이 떨리고,

기도와 생각과 일에 공허하게 지치고,

어지러워, 모든 것들과의 작별이 준비되어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이것인가, 혹은 저것인가?

둘 다인가? 남들 앞에서는 위선자이고,

나 자신 앞에서는 가증스럽게 비통해 하는 약골인가?

 

내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이미 쟁취한 승리로부터

무질서하게 도망치는 패잔병과 같은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와 같은 나의 외로운 질문들이 나를 조롱한다.

내가 누구이든, 오 하나님, 당신은 아십니다.

나는 당신의 것임을!

 

   참으로 자아에 대해 깊이있게 생각하며, 자신의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자아가 있음을 옥중에서 통찰한 우리시대의 신학자요 목회자인 본회퍼를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한다.

 

   크리스챤 아카데미의 강치원박사는 본회퍼의 '나는 누구인가'시를 소개하며,  자신의 삶의 3가지 회심, 신앙적 회심, 신학적 회심, 실존적 회심 가운데 신학적 회심을 가져다 준 분이 이 본회퍼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온라인 Zoom(줌) 화상강의를 이어갔다.

 

강치원 박사(책읽는 교회)

   본회퍼는 말한다. “종교의 시대는 지나갔다. 무종교적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무종교자의 주()도 될 수 있을까? 무종교적 기독교가 존재할까?”

   종교적 인간은 한계상황에 부딪힐 때 기계장치로서의 신(deus ex machina)’을 요청한다. 하지만 본회퍼는 세계는 신이라는 후견인없이도 살수 있는 성인이 된 세계가 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을 말한다.

   본회퍼는 저항과 복종에서도 사이의 존재 경계가 정해진 것이 아니나 결단속에서 파악해야 함을, 우리의 그때마다 현재적 상황을 극복해야 함을 말한다. 본회퍼는 3가지 과제를 제시한다. ‘교회는 국가를 향해 국가가 합법적인지 물어야 한다. 교회는 사회 질서의 희생자들에 대한 책밍이 있다. 수레바퀴 아래 있는 희생자들을 싸맬뿐 아니라, 수레바퀴를 저지할 수도 있어야 한다.’

   본회퍼는 운전자론을 말한다. “어떤 미친 이가 베를린 번화가에서 자동차를 인도로 몬다면 목사로서, 장례나 치러주고 위로나 해줄 수 없다. 내가 바로 그 자리에 있다면, 자동차에 올라 그 미친 운전사에게서 핸들을 빼앗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지금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또한, 그는 사로잡힌 실존을 말한다. ‘종교인이 아닌 예수인이 되어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요구한다. 고난은 능동성이 아니라 수동적 실존으로 나에게 가해진 나로 만들어짐을 감내하며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본다.

키에르케고르를 이야기하며, “루터가 지금와서 설교한다면 로마서가 아닌 야고보서를 설교했을 것이다.”라고 본다. 본회퍼는 인간의 세속적 성향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인간에게는 고난보다는 영광을, 주변보다는 중심에 대한 본능적 끌림이 있기 때문이다.

   루터는 수도원을 떠나 세상으로 되돌아왔다. 루터는 삶까지 포함한 믿음을 주장했는데, 제자직을 희생시키고 은혜의 교리만 소유하고, 값비싼 은혜가 뒤따름이 없는 값싼 은혜로 전락했음을 통찰한다. 세상을 수도원으로 만드는 것이며, 이제 세상 한복판에서 실천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스도인은 몸으로 세상과 부딪히게 되었고 이것은 백병전이라고 보았다.

    루터는 파계(破戒)를 통해 피안과 차안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보여주었다. 수도원도 세상 한복판으로 교회도 세상 한가운데로 나와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일어난 곳이 바로 세상 한 복판이었다. 그리스도인의 죽음과 부활도 세상속에서 이뤄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그대의 원수들 한 가운데 있어야 한다. 이것을 견딜 수 없는 사람은.. 장미와 백합꽃 한가운데 앉아있기를 원한다. 그는 악한 사람들 곁에 있으려 하지 않고 경건한 사람들 곁에만 있으려 한다. 만일 그리스도가 그대들처럼 행동했다면,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어디 있겠는가?(‘신도의 공동생활’, p.21)

 

   그리스도인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은 타자(他者)의 짐을 짊어지는 삶이며, 그것은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다.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루터가 십자가 신학과 영광의 신학을 대비시키며 기독교 신학을 십자가 신학이라고 말한 것을 본회퍼도 이어받는다.

그리스도인의 법은 다른 사람의 짐을 짊어지는 법이다. 짐을 짊어진다는 것은 용납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형제자매의 짐을 짊어지며 용납해야한다. 다른 사람은 내게 짐이 될 때만 형제가 되고 지배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신도의 공동생활’, p.104)

신을 도깨비 방망이 정도로 간주하는 자들에게 신은 단지 인간의 필요를 채워주는 자신이 만든신일 뿐이다. 본회퍼는 기독교의 구원을 죽음의 경계 이편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한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일어나는 삶의 한복판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것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도깨비 방망이 같은 하나님이해를 거부하며, 이 불안한 세상 한 복판에서 차안에 있는 타자속에서 초월자인 하나님을 뵈옵는 것이다.

  나치즘을 거부한 오직 예수를 따르던 본회퍼는 안전한 도피처로 피하지 않고, 패잔병이 택하는 숨겨진 오솔길로 가지않고, 책임적 신앙의 삶을 살았다. ‘십자가 군병이라는 순교적신으로 똘똘뭉친 광신도집단과, ‘지적으로 불성실한맹목적 신앙인들의 도피적 삶에 맞서 이 차안의 세상에서 책임있게 살아가는 것,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인은 많지만, 그를 따르는 제자가 귀한 세상, 책임있는 제자의 삶을 살아낸 본회퍼는 지금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뭐라 말할까?

 

  이어 최병학 교수(남부산용호교회 목사)의 피드백도 있었다.

  본회퍼의 "하나님은 우리 삶의 한복판에서 피안적"이라는 말은 현대 철학에서 들뢰즈가 말하는 '내재성의 평면'이네요. 그는는 과학을 지시의 평면(paln de référence)으로, 예술을 일관성의 평면(plan de consistence)으로, 철학을 내재성의 평면(plan d’immanence)으로 규정합니다.

  지시의 평면이란 현실적인 것으로만 구성되며 무한에 대한 사유는 포기하거나 연기하는 평면이며, 일관성의 평면은 정동과 지각으로 형성되고 유한한 것에 의해 창조되지만 이로부터 무한을 드러내는 평면입니다. 그러나 이 둘을 종합하여 내재성의 평면은 개념으로 구성되고 무한을 표현하는 평면입니다. 본회퍼의 종교적 각성이 현대철학에서는 이렇게 드러나네요.

 

 

최병학 목사의 논찬의 중요한 요지는 다음과 같다.

 

본회퍼 나를 따르라요약

 

제목인 나를 따르라!’를 살펴보자.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이끌리기 때문이다. 끌리는 것에는 이 작용한다. 필자가 사랑하는 임대식 목사님(의 사진 작품)에 이끌리는 것은 그 사진에는 악이 없고 선만 작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는 그러한 끌림이 없다. 악에는 감염, 오염, 전염(epidemic)이 있을 뿐이다. 타자를 바이러스로 감염시키고 예배와 복음을 오염시키고 전염병과 같은 광기를 퍼뜨릴 뿐이다. 이렇게 선함과 아름다움이 확산되는 방식이 이끌림이라면, 악의 확산은 생물학의 방식으로만, 더 나아가 정치적인 이간질로만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원함(want)이 없다. 그러나 선함과 아름다움에 이끌리는 것에는 원함이 있다. 제자들이 그리스도에게 이끌리고 따르는 것에는 이러한 원함이 동반된다.

 

틸리히(P. Tillich)식으로 표현하자면 존재의 힘’, 궁극적 존재에 이끌리고, 따르게 되고, 믿는 것은 그 힘(과 존재)가 선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것을 강치원 박사도 잘 지적했듯이, 본회퍼는 불가피한 저항과 불가피한 복종 사이의 경계에 서서 따름이 동반된 믿음, 곧 순종을 통해 진리이신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간략하게 책을 내용을 요약해보자. 이것은 본회퍼가 이 책에서 다룬 신학 명제들에 대한 요약이 될 것이다.

 

1. 신앙이란 무엇인가?

 

본회퍼에 의하면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를 인정하거나 교회 활동에 참여하는 것 자체는 신앙이 아니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뒤를 따름(Nachfolge)’이다. 그리스도의 뒤를 따름이 없는 신앙은 불완전한 믿음이요, 불신앙이다.

 

2. 은혜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참 은혜를 받았다면, 그리스도의 뒤를 따름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뒤를 따름이 없는 은혜는 참 은혜가 아니다. 그것은 거짓된 은혜이다. 본회퍼는 참 은혜를 값비싼 은혜라고 부르고 거짓된 은혜를 싸구려 은혜라고 부른다.

 

3. 십자가 혁명이란 무엇인가?

 

십자가에서 예수는 아무 힘없이 죽임을 당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세상으로부터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하고 패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하여 세상 속으로 들어와 십자가에 달린 것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적 개입과 공격을 뜻한다. 거짓에 대해 진리가, 증오에 대해 사랑이, 죽음의 세력에 대해 생명의 세력이 대립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육신으로 인해 이제 세상의 자기 폐쇄성이 깨어져버렸다. 그 안에 하나님의 새로운 현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4. 세례란 무엇인가?

 

이러한 혁명이 실제로 집행되는 곳이 세례이다. 세례는 단절(Bruch)을 뜻한다. 본회퍼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는 사탄의 힘의 영역 속에 개입해 들어가서 그의 속한 자들 안에 자기의 주권을 세우며, 자기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이로써 과거의 것과 미래의 것이 나누어진다. 옛 것은 지나갔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다. 단절은 인간이 자기의 사슬을 끊음으로써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스도 자신이 이미 그 전에 단절을 이루었다. 이 단절은 이제 나의 삶에서 세례를 통해 집행된다. 세상의 주어진 것들에 대한 직접성이 나에게서 깨어진다.

 

5. 예배와 교회 공동체란 무엇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세계와의 단절은 은폐된 상태에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예배와 교회 공동체의 삶에의 소속성을 통해 외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따라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공동체의 지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됨을 뜻한다(3:28, 고전 12:13).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으로, 그의 고난의 친교 안으로 세례를 받는다. 그들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가 그들 안에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공동체 안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공동체 안에 있다면, 참으로 우리는 몸으로 공동체 안에 있다. 그리스도의 몸은 그의 공동체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인 동시에 그의 공동체이다(고전 12:12).

 

 

6. 성만찬과 교직

 

그리스도의 몸은 공동체의 형태로 보여질 수 있는 몸이다. 이 몸은 말씀의 설교세례와 성만찬을 통해 보여질 수 있다.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 자신이 성령 가운데 말씀하시며 세례와 성례전 안에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몸으로 만나시며 그의 몸의 친교에 참여시킨다.

 

 

7. 칭의와 성화란 무엇인가?

 

칭의는 이미 일어난 하나님의 행위를 그리스도인들에게 선언하며, 성화는 그들을 성화시킬 하나님의 현재적이며 미래적 행위를 약속한다. 칭의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친교 속으로 옮겨지며, 성화는 그들이 옮겨진 그 공간, 곧 공동체 안에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보존한다. 칭의는 그들을 죄된 과거로부터 떼어놓는 반면, 성화는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 머물게 하고 믿음 안에 서게 하며, 사랑 안에서 성장케 한다. 칭의는 새 인간의 새 창조이며, 성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새롭게 창조된 인간의 유지와 보존이다.

 

 최병학목사는 결론부에서 이런 이야기로 마무리하고 있다.

 

기원전 3세기말 진()의 시 황제는 중국사상 첫 통일제국을 창출함으로써 기나긴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했다. 그러나 진시황제 사후, 제국의 통제력은 약화되었으며 진승-오광의 반란이 일어나자 천하는 다시 대란의 시대에 접어든다. 이때 패()의 유방과 초()의 맹장 항우가 등장하는데, 유방이 항우와의 싸움에서 계속해서 지자, 참모인 장양이 닭싸움으로 유방에게 싸움의 도를 가르쳐 준다.

 

닭싸움장에는 여러 종류의 닭이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싸움을 잘하는 싸움닭이 어떤 닭인지를 설명하여 준다. 먼저 1단계로 최고로 뻐기는 단계가 있는 닭은 쉽게 지며, 2단계로 쉽게 흥분하는 닭은 몇번 이기나 끝까지 가지 못하고, 3단계로 날개를 접고, 꼬꼬댁 소리를 지르지는 않으나, 교만하게 흘겨보는 닭이 있는데, 이도 역시 결승까지는 가지 않는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4단계인 부동의 자세인 닭은 움직이지 않으며, 한번 공격으로 상대의 목을 물어 승리하게 되는데, 유방의 전략도 이래야 한다고 장양이 가르쳐 준 것이다. 그래서 천하를 다투어 연전연패 한 끝에 유방이 마침내 초를 격파하고 한나라를 수립하게 된다. 위의 일례를 통해 성서의 바울의 모습을 한 번 살려보도록 하자. 바울은 싸움닭의 모습처럼 변해간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고전 15:9)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남으로 바울로 바뀌고 이제 복음의 일꾼이 되었다. 그런 그가 자신을 표현하기를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말하고 있다. 겸손한 것 같지만, 그래도 내가 사도라는 뻐기는 모습이 있지 않을까?

 

이런 그가 옥중서신인 에베소서를 쓸 때는 다음과 같이 바뀐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3:8) 여기에 보면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자신을 이제 사도가운데 하나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감옥에 가면 사람이 변하는 걸까? 바울은 감옥에서 겸손의 훈련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 목회서신인 디모데 전서를 쓸 때는 더욱 겸손한 단계로 바뀐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딛전 1:15) 자신이 얼마나 낮아지는가에 따라 신앙의 깊이가 가려지는 것은 아닐까? 얼마만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겸손하는가에 따라 신앙의 깊이와 넓이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만약 본회퍼가 감옥에서가 아니라, 이후 목회자로서 여생을 좀 더 살았다면 그의 다음 글은 어떤 모습일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바로 이런 점이다. 본회퍼가 목회적 마인드를 갖고 다시금 그의 신학을 정립했다면 어떤 아름다운 글귀들로 오늘날 존재할까?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음은 본회퍼가 너무 일찍 하나님의 나라로 갔기 때문일 것이다.